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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때 퇴학당한 독립유공자에 52년만에 명예졸업장
남편대신 졸업상 받은 부인도 감격의 눈물. 일제에 항거했다하여 졸업을 15일 앞두고 퇴학당하고 끝내는 옥살이를 치르던중 숨진 독립유공자에게 52년만에 졸업장이 수여됐다. 20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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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조국|남북의 평행선 어디까지 갈 것인가?
「프랑스」의 유력지 「르·몽드」는 「앙드레·퐁텐」 「르·몽드」 주필의 방한기 ④를 『하나의 조국』이란 제목으로 20일 게재했다. 다음은 그 요지. 「밴스」 미 국무장관은 지난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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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계, 3·1운동재평가 연구 활발|33인은 기폭제·주도자는 「민중」
3·1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의나 평가는 아직도 사학자들의 끊임없는 연구과제가 되고 있다. 새로운 자료의 발굴뿐 아니라 운동의 성격이나 의의에 대한 평가도 사학자들 사이에 토론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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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G 이끄는 두 얼굴
마르고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파트」(62)는 「사이공」의 새 공산 정부의 제1인자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베테랑」 공산주의자이며 공산 PRG의 이론가인 그는 「하노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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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임시 혁명 정부 PRG와 월맹|그 역관계와 4·30후의 전개
PRG(월남 임시 혁명 정부)가 월맹의 예속 단체냐, 아니면 독립된 별개의 권력 집단이냐 하는 문제는 아직껏 물리지 않은 숙제 가운데 하나다. 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남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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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제자=김홍대)|제1장 김성주의 소년 시절
1929년 봄, 공산청년회 관계자의 검거 선풍을 피해 김성주가 길림에서 이종락 부대로 도망했을 때, 이종락 부대는 마적떼 마골 일당을 토벌하던 때에 비해 성격이 아주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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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제33화 종로 YMCA의 항일운동(30)|전택부
전회에서 말한 바와 같이 YMCA당국은 농촌사업에 대한 조사와 방향설정과 조직을 마치게 되었다. 이를 위하여 국내의 많은 학자들이 동원되었고 국제조사단이 왔고 외국자본과 기술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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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5)제33화 종로 YMCA의 항일운동(25)|전택부
일제의 장벽을 뚫는 또 하나의 작업은 한국YMCA가 세계연맹에 직접 가맹하지 못하고 반드시 일본YMCA를 통해서만 가맹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가맹 조항을 삭제하는 작업이었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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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7)제33화 종로 YMCA의 항일운동(7)|전택부
「이또」통감은 부임하는 즉시로 YMCA를 눈의 가시처럼 느꼈다. 왜냐하면 우선 YMCA는 외국인 세력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YMCA는 일본의 정치체제와는 관계없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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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4)|종로 YMCA의 항일 운동 (4)|전택부
지난번에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의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운동은 「러시아」 세력을 저지하기 위한 민권 운동인 반면에 YMCA는 항일을 위해 창설됐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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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70돌 YMCA-어제와 오늘
28일로 창립 70주년은 맞는 서울중앙YMCA(기독교청년회·이사장 박대선)는 26일 동 회관에서 기념식을 갖고 민족의 얼과 독립·자유의 수호자로서의 발자취를 기렸다. 윤주영 문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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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5)북간도(16)|이지택(제자 이지택)
간도가 독립운동의 기지로서 안성마춤인 것은 일본과 중국이 싸우는 관계도 있었지만 특히 유리한 것은 노령에 인접해 있었던 점이다. 독립운동자들은 일본 놈을 쏘아 죽이거나 일본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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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10주기 맞은 유림 선생 회상|권오돈 (전 연세대교수)
단주 유림 선생이 회천하신지 오늘로써 10주년이 된다. 선생은 1894년 전주에서 태어나 61년4월1일 세상을 뜨기까지 그의 일생은 민족의 수난, 바로 그것이었다. 23세 때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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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과목 폐지에 맹휴로 항거|창씨 안한 박순천씨 교직 사퇴|미·일 감정 악화되자 미국인 교사들 돌아가|일제 동화 정책
3·1 운동 후 총독부는 표면적으로 소위 문학정책을 써 우리민족의 악학된 대일감정을 유화 시키려고 꾀했으나 안으로는 간섭이 점점 더 심해졌다. 모든 학교에서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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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정신을 지주로 삼자
3·1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무장탄압을 받아 우리 민족이 당장에는 독립의 숙원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3·1운동의 성과가 수포처럼 무산된 것이 아니었음은 그후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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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의 시대적 의의
몇해전의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일부식자간에는 3·1운동에관한 몇가지문제를 둘러싸고 새삼스러운 논의가 벌어진적이 있었다. 지도자의 무기력성을 탓하는 사람이 있었는가하면 그렇게도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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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반평생|건국훈장받는 103명의 얼굴
정부는 제49회 3·1절을 맞아 대한민국독립에 공이 큰 내·외국인 1백3명에게 건국훈장을, 내국인 4백56명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하기로했다. 독립유공자 심사대상으로 정부에 접수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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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전봉준(하) - 유홍열
1894년7월23일 일본공사 대조규개는 우세한 일본군을 이끌고 서울에 돌입하여 단독으로 내정개혁을 단행(갑오경장)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청일 양국은 교전상태에 들어가 소위 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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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어느 계층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그 객관적 평가 - 이선근
누구나 짐작하다시피 국내의 3·1운동은 역시 1918년 11월 이후부터 세계정세의 급격한 변동과 해외 독립운동 지사들의 비밀 연락을 받아 「민족의 지성」인 종교인·교육인 들이 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