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4만 거주, 5천명 귀국희망

    【동경=박동순특파원】2차 대전 중 일본 정부의 「국민 징용령」으로 징용된 한국인은 모두 6백만명으로 이중 탄광이나 군사시설의 노무자로 「사할린」에 거주해 온 한국인은 4만3천여명(

    중앙일보

    1973.06.16 00:00

  • (568)|휴전회담(후반부)(23)|한미관계의 긴장(3)

    「아이젠하워」대통령은 6·18반공포로석방직후 이 대통령에게 전문「메시지」로 항의하는 한편 직접 특사를 서울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원래 「아이크」행정부는 6·18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중앙일보

    1973.06.15 00:00

  • 사할린에 있는 한인송환 요청

    한편 의원 간친회 일본측대표인「우노·소오스께」 중의원의원은 13일「다나까」수상이 9월 중순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 「사할린」에 잔류중인 약 7천명의 한국인교포송환 희망자가 송환되

    중앙일보

    1973.06.14 00:00

  • 문화협정체결 촉구

    【동경=박동순·조남조특파원】한·일 의원 간친회 2차 총회는 13일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이틀간의 회의를 끝마쳤다. 이 공동성명에서 양국 의원단은 문화·예술·교육 및 과학기술 분야에

    중앙일보

    1973.06.13 00:00

  • (468)휴전회담(후반부)(21)

    (1)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석방은 휴전회담을 둘러싸고 그동안 가뜩이나 팽팽히 맞서오던 한·미 관계를 파국일보직전 상태로 몰아넣었다. 미국입장에서 볼 때 한국정부의 6·18포로석

    중앙일보

    1973.06.11 00:00

  • (467)휴전회담(후반부)(19)

    (11) 육지로 분리돼 나온 반공포로수용소에는 프로들의 석방탄원 혈서가 집더미처럼 쌓였고 그 보관소 근처는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대한반공청년단은 우익포로들이 52년 봄 거제도에

    중앙일보

    1973.06.06 00:00

  • (466)휴전회담(후반부)(18)

    반공포로 석방(10) 미군포로 관리당국은 우익포로들이 대한반공청년단을 조직, 적색포로들과 대결하며 석방투쟁을 벌이는 것을 처음에는 단순한 감투싸움으로만 보았을 뿐 생사를 건 사상대

    중앙일보

    1973.06.04 00:00

  • 일본의 한인노무자 귀국선 「부도환」|"계획적인 폭파로 침몰했다"|

    해방되던 해 8월24일 하오 일본에 강제 연행됐던 한국인 노무자 및 가족 3천7백 여명을 싣고 한국으로 가다 「마이쓰루」항 앞 바다에서 침몰, 5백42명의 한국인 사망자를 낸 일본

    중앙일보

    1973.05.24 00:00

  • (457)휴전회담(후반부)(9)|반공포로 석방(1)

    1953년 6월18일 새벽 2시-. 이른 장마철에 접어든 우리 나라 남부 지방의 날씨는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야산과 들판에는 안개가 자욱히 끼여 지척을 분간키가 어려웠다. 이상하

    중앙일보

    1973.05.14 00:00

  • (456)휴전회담(후반부)(8)|이 대통령의 항거(5)

    「유엔」군 측이 송환 반대 포로의 중립국 이관에 동의 안 5·16 제안을 내놓은 지 5일 만인 1953년 5월30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고, 중

    중앙일보

    1973.05.11 00:00

  • (455)휴전회담(후반부)(7)|이 대통령의 항거(4)

    「아이젠하워」행정부는 1953년 5월25일 공산 측에 제출할 새 제안을 마련하는데 있어 철저한 비밀의 장막을 쳤다. 제안 골자는 휴전과 함께 석방하려면 송환 반대 한국인 포로들도

    중앙일보

    1973.05.09 00:00

  • (453)|휴전 회담 (후반부) (5)|이 대통령의 항거 (2)

    이 대통령은 1953년4월19일에 이어 다시 판문점 본 회담 재개 2일전인 4월24일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양유찬 주미 대사를 시켜 중공군의 북한 잔류 허용을 전제로 한 휴전

    중앙일보

    1973.05.04 00:00

  • (451)|휴전회담(후반부)(3)|포로토의의 타결

    상병포로교환이 끝난 다음날인 l953년4월26일에 휴전회담 본회의는 6개월만에 재개되어 회담성패의 열쇠가 되고있는 포로문제 토의에 들어갔다. 앞서도 지적한대로 공산 측은 「스탈린」

    중앙일보

    1973.04.27 00:00

  • 재일 거류민단의 항의

    일본의회는 최근 외국인들의 출입국에 관한 법적 규제를 강화하기 위한 출입국 관리령 개정안을 심의중이다. 이 법안은 『범법 또는 정치적인 음모에 가담한 것이 밝혀진 외국인의 추방』을

    중앙일보

    1973.04.24 00:00

  • 지병치료위해 각성제 밀매단에 얽혀든 원폭병 여인의 기구한 역정

    이번 국제 각성제 밀수 사건은「피폭자 구원 일한협회」를 발촉하게까지 한 원폭 피해자 손귀달여인(44·부산시 서구남부민동)이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한 집념으로 국내 조직과 일본 조직

    중앙일보

    1973.02.24 00:00

  • 「사할린」 30년의 공백

    해방 전인 43년에 「사할린」에 노무자로 건너갔다 억류 생활 30년만에 일본에 돌아온 홍만길씨는 현재 「사할린」에 살고 있는 4만명의 한국인 중 대부분이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하

    중앙일보

    1973.02.05 00:00

  • 성년된 대한 변협|전국회원 7백45명|정의 위한 압력단체

    변호사단체의 최고 통합체인 대한변호사회(회장김윤근)가 1일로써 성년에 달했다. 대한변협은 이날 창립20주년 기념식을 한국일보사 대강당에서 갖고 국민의 염원에 부응하는 새로운 호상을

    중앙일보

    1972.09.01 00:00

  • (442) 경무대 사계(69)|황규면

    우리 정부는 기본적으로 휴전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특히 포로 교환 조항에 반대했다. 「유엔」 측과 공산 측은 포로 송환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갈이 합의했던 것이다. 첫째 양측은 송환을

    중앙일보

    1972.04.25 00:00

  • 사할린 한국교포귀환허용을 요청

    【동경=조동오 특파원】27일「후꾸다」(복전) 일본외상은 방일중인 소련외상「그로미코」 와의 회담에서「사할린」에 있는 약7천명의 한국인교포의 귀환을 인도적인 견지에서 소련정부가 허가

    중앙일보

    1972.01.29 00:00

  • (227)남과 북의 포로수용소(19)

    「마크·클라크」대장은 1953년1월에 북괴가 남한 수용소의 포로들을 조종하여 그들을 유엔군 후방의 공산 전투원으로 사용하려던 음모에 관한 전모를 공표하였다. 공산주의 음모에 관한

    중앙일보

    1971.09.14 00:00

  • (61)

    『할아버지, 「미다」할아버지. 오늘은 무얼 사주시래요?』 「아파트」 주변의 코흘리개들이 매일같이 사탕이며 과일을 사주는「미다」할아버지 (일본명 삼전승호·64)의 뒤를 졸래졸래 따르

    중앙일보

    1971.08.23 00:00

  • 해방 26주년…분단·통일 관련된 결정과 제의

    일제에서 해방된 지 26년. 국토는 양단된 채 통일를 전망은 묘연하기만 하다. 그러나 최근 미·중공간의 접근과 국제권력구조의 재편성과 함께 한반도에도 긴장완화의 기미가 서서히 엿보

    중앙일보

    1971.08.14 00:00

  • (209)「6·25」21주…3천여의 증인회견·국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딘 소장의 고난(1)|남과 북의 포로 수용소(1)

    한국 전쟁은 여러 가지 면에서「통상 전쟁」과는 다른 점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포로 문제는 그 대표적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남과 북의 포로 수용소도 포화가 불꽃튀

    중앙일보

    1971.08.02 00:00

  • (하)귀환 중의 손치규씨 고발수기

    「사할린」은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다. 겨울에는 보통 하오 5시만 되면 어두웠는데 긴긴밤을 새우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밤마다 고향의 처자생각이 떠오르고 어떻게 하면 빠져 나갈까하고

    중앙일보

    1971.07.1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