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478) 중립지대안의 수용소(3)|인도군의 포로관리(3)

    공산측은 10월초의 총격사건을 계기로 인도군에 대한 한국정부와 반공포로들의 감정이 가일층 악화되자 이를 교활하게 이용, 무력 충돌까지를 획책했다. 우선 그들은 인도군에 대한 태도를

    중앙일보

    1973.07.02 00:00

  • (473)|휴전회담(후반부)(25)|협정조약(1)

    2만7천명의 반공포로가 석방되자 공산측은 노기가 등등하여 6월20일의 비밀회의에서 탈출포로를 모두 다시 잡아 가두라고 호통을 치고는 일방적으로 휴전회담의 휴회를 선포하였다. 6·1

    중앙일보

    1973.06.20 00:00

  • (472)휴전회담(후반부)(24)|한미관계의 긴장(4)

    6월25일부터 시작된 서울의 「소 휴전 회담」은 18일 만인 7월12일에야 일단락 되어 공동 「코뮤니케」가 발표되었다. 「아이젠하워」대통령의 특사 「월터·로버트슨」차관보는 처음에는

    중앙일보

    1973.06.18 00:00

  • (568)|휴전회담(후반부)(23)|한미관계의 긴장(3)

    「아이젠하워」대통령은 6·18반공포로석방직후 이 대통령에게 전문「메시지」로 항의하는 한편 직접 특사를 서울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원래 「아이크」행정부는 6·18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중앙일보

    1973.06.15 00:00

  • (470)휴전회담(후반부)(22)|한미관계의 긴장(2)

    포로관리의 직접 책임자인 「마크·W·클라크」「유엔」군 총사령관도 「아이젠하워」대통령에 이어 이승만대통령에게 6·18조치를 항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아이크」

    중앙일보

    1973.06.13 00:00

  • (468)휴전회담(후반부)(21)

    (1)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석방은 휴전회담을 둘러싸고 그동안 가뜩이나 팽팽히 맞서오던 한·미 관계를 파국일보직전 상태로 몰아넣었다. 미국입장에서 볼 때 한국정부의 6·18포로석

    중앙일보

    1973.06.11 00:00

  • (467)휴전회담(후반부)(19)

    (11) 육지로 분리돼 나온 반공포로수용소에는 프로들의 석방탄원 혈서가 집더미처럼 쌓였고 그 보관소 근처는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대한반공청년단은 우익포로들이 52년 봄 거제도에

    중앙일보

    1973.06.06 00:00

  • (466)휴전회담(후반부)(18)

    반공포로 석방(10) 미군포로 관리당국은 우익포로들이 대한반공청년단을 조직, 적색포로들과 대결하며 석방투쟁을 벌이는 것을 처음에는 단순한 감투싸움으로만 보았을 뿐 생사를 건 사상대

    중앙일보

    1973.06.04 00:00

  • (459)휴전회담(후반부)(11)

    반공포로 석방은 포로자신들과 군·경, 일반국민이 삼위일체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수행되었다. 휴전조인이 임박함에 따라 석방 D「데이」를 부랴부랴 6월18일로 잡았기 때문에 실행계획이나

    중앙일보

    1973.05.18 00:00

  • (457)휴전회담(후반부)(9)|반공포로 석방(1)

    1953년 6월18일 새벽 2시-. 이른 장마철에 접어든 우리 나라 남부 지방의 날씨는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야산과 들판에는 안개가 자욱히 끼여 지척을 분간키가 어려웠다. 이상하

    중앙일보

    1973.05.14 00:00

  • (456)휴전회담(후반부)(8)|이 대통령의 항거(5)

    「유엔」군 측이 송환 반대 포로의 중립국 이관에 동의 안 5·16 제안을 내놓은 지 5일 만인 1953년 5월30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아이젠하워」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고, 중

    중앙일보

    1973.05.11 00:00

  • (455)휴전회담(후반부)(7)|이 대통령의 항거(4)

    「아이젠하워」행정부는 1953년 5월25일 공산 측에 제출할 새 제안을 마련하는데 있어 철저한 비밀의 장막을 쳤다. 제안 골자는 휴전과 함께 석방하려면 송환 반대 한국인 포로들도

    중앙일보

    1973.05.09 00:00

  • (453)|휴전 회담 (후반부) (5)|이 대통령의 항거 (2)

    이 대통령은 1953년4월19일에 이어 다시 판문점 본 회담 재개 2일전인 4월24일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양유찬 주미 대사를 시켜 중공군의 북한 잔류 허용을 전제로 한 휴전

    중앙일보

    1973.05.04 00:00

  • (451)|휴전회담(후반부)(3)|포로토의의 타결

    상병포로교환이 끝난 다음날인 l953년4월26일에 휴전회담 본회의는 6개월만에 재개되어 회담성패의 열쇠가 되고있는 포로문제 토의에 들어갔다. 앞서도 지적한대로 공산 측은 「스탈린」

    중앙일보

    1973.04.27 00:00

  • 「닉슨」 2기의 대한 정책

    【워싱턴=김영희 특파원】4년 전 「닉슨」 대통령이 처음 당선된 것은 한국인들이 미국 정보 함 「푸에불로」호 납북 사건의 충격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던 시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중앙일보

    1972.11.11 00:00

  • 미래 투시할 주체적 교육을|교육 이념 확립을 위한 두 학술 대회

    어떤 인간을 길러 낼 것인지에 대한 목표 부재는 한국 교육 부실의 원인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강연회 (13일·시민 회관) , 「심포지엄」 (14일·연세대)등

    중앙일보

    1972.10.16 00:00

  • “인도대화 쉽지 않다”재인식|C·S·모니터기자가 본 남북적 회담과 한국인

    【뉴요크21일=김영희 특파원】「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지는 19일「엘리자베드· 폰드」기자의 서울발신 보도를 통해 한국민들은 최근 북한사람들의 서울방문기간에 긍지와 자신을 느꼈다고

    중앙일보

    1972.09.21 00:00

  • (551)제자 이석오|내가 아는 이박사-경무대 사계 여록(178) 한갑수|방일일화

    54년 이박사는 「아이젠하워」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나는 당시 「앨라배마」주에 있는 미 공군참모대학에 수학 중이어서 이박사의 방미동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중앙일보

    1972.09.06 00:00

  • 브라질 이민사의 환국

    『살아 있는 한국의 「브라질」 이민사』라 할 수 있는 교포 장승호옹(65)이 47년만에 그리던 고국의 땅을 다시 밟았다. 장옹은 「브라질」이민 초창기에 이역 만리 「상우파울루」로

    중앙일보

    1972.08.14 00:00

  • (351)유격전(20)|민간유격대

    6.25전쟁 중 적지가 된 여러 지방에서는 애향심과 적개심에 불타는 지방유지들과 청년들이 공산군이나 그 기관을 기습하는 등 산발적인「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들은「유엔」군과 경찰이

    중앙일보

    1972.07.17 00:00

  • 일본의 독무대…아시아 영화제

    17일 서울에서 개막된 제18회 아시아 영화제는 주최측(한국영화제작자협회)의 무계획성으로 행사 「스케줄」에 커다란 차질을 초래한데다가 대량의 일본영화 일반공개에 따른 시비, 그리고

    중앙일보

    1972.05.20 00:00

  • 영화 견본 시

    제18회 「아시아」 영화제가 17일부터 화려한 막을 서울에서 올렸다. 이번 영화제에는 11개 회원국 중에서 월남과 태국을 제외한 나머지 9개국이 참가, 대표단 총수 1백36명에 출

    중앙일보

    1972.05.18 00:00

  • (447)제26화 경무대 사계(74)

    한·일 회담은 「구보다」(구보전)망언으로 파동을 겪게되지만, 그 경위에 관한 설명을 잠시 뒤로 밀고 이대통령의 외교자세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대통령은 외교를

    중앙일보

    1972.05.01 00:00

  • (442) 경무대 사계(69)|황규면

    우리 정부는 기본적으로 휴전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특히 포로 교환 조항에 반대했다. 「유엔」 측과 공산 측은 포로 송환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갈이 합의했던 것이다. 첫째 양측은 송환을

    중앙일보

    1972.04.25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