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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주지경선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부터 젊은 승려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불교혁신운동은 사찰령 (寺刹令) 의 철폐와 주지 (住持) 제도의 개혁이 목적이었다.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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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강릉甲
강원도에선 아직 자민련 바람이 피부에 직접 느껴지지 않는다. 신한국당은 그래서 안심하는 표정이다.그러나 자민련은 『선거가 가까워올수록 달라질것』이라고 장담한다. 만일 이번 총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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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선정 국내 10大뉴스
*노태 비자금 파문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이 재임기간중 4,500억원의 뇌물을 받아 그중 2,857억원을 차명예금.부동산등에 은닉해둔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기소됐다.전직 대통령이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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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사 꽃무늬조각 일제잔재 논란 재연
「일제 잔재인 조각무늬를 없앨 것이냐,말 것이냐」. 대표적 일제시대 건물중의 하나인 충남도청사에 남아있는 정체불명 무늬의 철거여부를 둘러싸고 매년 3.1절만 되면 논란이 재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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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사땅 사기 연기관권선거 재수사 용의없나(국회본회의 지상중계)
◎대학 못가는 연 37만명 학생 취업대책은/호주산 「농약밀」 1만톤 유통 고발 왜 않나 ▷사회·문화분야 대정부 질문(29일)◁ ◇최낙도의원(민주)=북한 고위간첩 이선실일당이 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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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장·교장 등에도 선발권 부여/정신대동원 일왕칙령
여자정신근로령을 재가하여 이를 공시함. 일본천황서명날인 소화십구년 팔월이십이일 내각총리대신 소기 국소 군수 대신 등원은차랑 내무 대신 대달 무웅 후생 대신 광뢰 구충 부서 늑령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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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7)제86화 경성야화(62)조용만|매일신보
신문과 라디오에서는 일본이 이기고 있다고 떠들어댔지만 미군은 점점 일본본토로 다가오고 본토결전이니, 일억옥쇄니 하는 불길한소리가 나돌았다. 한편 무솔리니는 이미 항복했고 독일의 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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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3)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
나는 즉시 대학에 가서 고목법문학부장을 찾았다. 부장이란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로 치면 학장에 해당하는데 법과대학장과 문과대학장을 겸하고 있는 셈이었다. 고목부장은 일어·일문학선생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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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0) 제81화 30년간의 문화계(43) 조용만
만주사변 때에는 약간 술렁거렸지만, 일본군부의 콧대가 세어서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고 우리들은 관망만 하고 있었는데, 반제동맹사건은 정작 우리들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으므로 쇼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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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권오돈 옹
> 『창씨를 비방했다고 종로서에 붙들려가서 20일이나 문초를 받았지. 매를 때리고 온갖 협박·공갈로 창씨를 하도록 윽박질렀지만 끝까지 거절했더니 엉뚱하게 횡령죄로 얽어넣어 열달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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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징용
일본의 평화헌법은 오도된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헌법이다. 그런데 그 오도된 침략전쟁의 첫 희생자는 누구였으며 또 태평양전쟁의 시발인 대륙전쟁의 도발로 가장 많은 출혈을 강요당했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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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극비문서」공개
【동경=김두겸특파원】 50년전의 광주항일학생운동의 전모를 밝히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극비문서가 일본「나고야」에 있는 출판사「후우바이」(풍매)사가 발간한 단행본을 통해 공개됐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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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제65화 불교 근세 백년 (40)|이종욱 스님|강석주
당시 스님들이 일제에 대항해 전개한 독립 운동에는 세가지 형태가 있었다. ①산업을 중점적으로 장려하여 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해야한다는 생각과 ②민족 교육을 진흥시켜 민족의 각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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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함춘원시절(21)-??????
내 얘기를 하다보니 벌써 l930년대 후반까지 가버렸는데 잠시 기억을 20년대로 되돌려야겠다. 경의전을 졸업한 24년부터 함회원에 커다란 변혁의 물결이 밀려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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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1)국립경찰 창설 제41화(29)
정부조직법안을 심의하는 국회에서는 이틀째 불꽃 퉁기는 경찰독립논쟁이 계속됐다. 48년7월15일 국회 제30차 본회의에서는 치안부 독립 안의 등의자인 정현모 의원 등 41명이 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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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제19화 형정 반세기(9)
사내 이후의 총독들이 귀가 아프도록 내선일체를 내세웠으나 이는 말로만일뿐, 일제 36년 동안 형무소 안팎을 가릴 것 없이 조선인·일본인의 구별은 미격 했다. 조선 13도의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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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방송 40년(7)|이덕근(제자는 필자)
경성방송국이 27년2월 방송을 시작할 때의 출력은 말코니 송신기 1㎾였다. 실패와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33년4월에 제2방송이 생길 때는 10㎾로 출력이 늘어나고 33년7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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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제자는 필자|제13화 방송 50년(1)
※편집자주=이덕근씨는 1943년 경성방송국에 입사, PD 또는 아나운서로 활약하다 해방 후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거쳐 현재 서라벌예술대학 방송학과 교수로서 계속 우리나라 방송문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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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제12화 조선은행(1)
조선은행이 처음 설립된 것은 내가 입행하기 8년전이니까 1909년(명치42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은행권발행이나 국고업무를 맡고 있던 일본계 제일은행으로부터 이들 업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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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제11화 경상제국대학(5)
임문석씨는 졸업 후 평안도선천군수로 갔는데 총독부의 연례 지방행정관회의 때 우원 총독의 농촌진홍정책내용에 대해 농민착취 내용이 많다고 약30분간 신랄한 비판을 가해 『당신은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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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술개화(5)|정구충
초창기 의료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부인환자를 다루는 일이었다. 워낙 내외가 심해서 손목잡고 맥 보는 것도 어려운 때였기 때문에 가슴을 풀어 해치고 두 두려 보는 등의 현대식 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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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교육의 연륜을 더듬어(8)|충주 교현국민학교
열혈청년 조한설은 충주의 명륜당에 (현교현동180)10여 학도를 모아서당을 열었다. 조한설은 고종황제가 이미지난해(1894) 서정혁신을 단항, 예조를 폐하고 학무아문을 발하여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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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새 교육의 연륜을 더듬어|대구 희도국민학교
한자앞도 분간키 어려운 밤이었다. 『쿵-와르르』 성벽주변에 살던 백성들은 꼬박 뜬 눈으로 밤을 밝혔다. 『불질을 하는건가?』 『사방에서 들리는데…』 광무산년 (1906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