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AL 비행 틀림없다
수도 경비사는 지난 22일 밤 대공포 사건에 대해 『22일 밤 7시21분 JAL 항공기가 항공기 통제 구역 B지역을 넘었을 뿐 아니라 A지역으로 침범했으므로 즉각 예광탄으로 경고
-
(77)국군의 전선정비(1)
한강 방어전을 끝낸 국군이 수원을 거쳐 평택으로 후퇴한 것이 7월4일이었다. 이곳에 집결한 국군의 사단 머리수만은 수도·제1·제2·제5·제7사의 5개 사단이었지만 실병력은 반수도
-
(71)대전의 25시(10)|미24사단의 혈투(4)|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역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북괴군은「딘」소장이 처음 판단한 것처럼 점령한 제 2사단과 대평리 정면의 제3사단, 논산으로 돈 제4단, 그리고 주력을 공주 쪽으로 옮긴 제 105 탱크사단의 4개 사단을 가지고
-
(8)대전25시-민족의 증언(69)|미 제24사단의 혈투(2)
북괴남침에 앞장을 섰던 제105 「탱크」 사단의 전 정치장교를 전회에 이어 다시 등장시켜 미 제25사단과의 전투상황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오기완씨 (당시북괴군제105「탱크」 사단
-
(68)대전의 25시(7)|미 제24사단의 혈투(1)|「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미 제24사단이 개전 초에 참담한 패배를 거듭했지만 북괴군도 7월 중순에 접어들면서부터 진격 속도가 처지기 시작했다. 특히 미 공군의 제공권 장악으로 남침의 앞장을 섰던 막강의 북
-
(60)제2본영…수원(7)|「스미드」기동부대(중)
「찰즈·스미드」중령은 의기양양하게 대원을 이끌고 오산에 포진했다가 적「탱크」의 맹습으로 분산 후퇴했다는 것은 전회에서 기록한대로다. 그러나 「스미드」의 직속상관인 제24사단장 「월
-
(59) 제2본영…수원(6)|「스미드」기동부대(상)
한국전쟁에서 처음으로 북괴군과 교전한 미 지상군은 「찰즈·B·스미드」중령 부대였다. 미 해·공군은 6월 27일 하오부터 적과 교전상태에 들어갔지만 지상군은 29일에 「맥아더」원수가
-
(57)「6. 25」20주....3천여 증인 회견. 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제2본영... 수원(4)|(상)
한강이남으로 후퇴한 국군으로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흩어져 남하하는 낙오병들을 수습, 재편하여 방어선에 배치, 지연작전을 전개함으로써 미군의 내원이 있을 때까지 분초가 아까운 시간을
-
(56) 제2본영... 수원(3)|「6.25」20주... 3천여의 증인 회견. 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맥아더」원수가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돌아간 그 이튿날인 6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은 군 최고 지휘부의 이동을 단행했다. 바로 이날 아침 미국에서 급히 돌아온 정일권 준장을 소장으로
-
남과 북의 형세 (16)|「6·25」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
6·25전의 국군의 정신 자세에 대해 몇 사람의 조언을 더 들어보기로 하겠다. ▲김형일씨 (당시 정일권이 삼군 총 참모장의 비서실장 겸 특별 보좌관·중령·현 국회의원·신민·48)
-
(40)6·25 20주…3천여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남」과「북」의 형세(3)
북괴가 1948년 2월에 이미 완전 전투태세와 장비를 갖춘 3개 정규사단의 군대를 창설, 이를 내외에 정식으로 선포했다는 것은 본 연재 전회에서 기록한 대로이다. 그들의 이런 창
-
(36)6·25 20주 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36)
한강다리는 처음에는 27일하오 4시쯤에 끊을 계획이었다. 이날 하오께에 창동저지선이 무너지자 육본지휘부는 참모회의를 거쳐 시흥으로 후퇴를 결정, 하오 1시께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
(35)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35)
② 최창식대령이 사형을 받은 첫 군법회의의 모습을 좀 더 다루어보기로 하겠다. 원태섭재판장과 피고와의 문답 내용은 본연재 34회에 소개한 대로다. 다음은 최창식공병감으로부터 폭파명
-
(34)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34)|한강교의 폭파(1)
1950년8월28일, 이날도 낙동강 전선에서는 한치의 땅을 지키고 뺏으려는 피아의 공방전이 불꽃을 퉁기고 있었다. 다부동, 안강, 기계, 마산전면의 적은 숨쉴 사이도 없이 낙동강교
-
(33)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33)
서울사수의 마지막 저지선인 미아리, 청량리 방어선은 대체로 27일 밤중에 무너졌다. 육공반들이 적탱크를 부수려고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삼가리와 미아리고개에서 포격으로 적
-
(32)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32)|작전지도의 혼돈(3)
육군본부가 미군사고문단(KMAG)단장대리 윌리엄·라이트 대령으르부터 맥아더 전방지휘소(ADCOM)가 한국에 설치된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했던 시흥으로부터 27일하오 6시쯤 서울에
-
(30)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먼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30)
육군본부 지휘부가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하는 적을 요격하여 싸우는 국군부대의 방어작전을 지도하는데 있어, 몇가지 과오를 범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특히 적의 주공로인
-
(29)6·25 20주 3천년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29)|금은의 반출(하)
금은반출의 직접 관계책임자는 구용서 한은총재, 국방부 제3국장 김일환대령, 보병사령관 송요찬대령의 세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꼭 20년전의 옛 일이어서 그런지 세 사람의
-
(28) 금은의 반출(상) 가장 길었던 3일(28)|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6·25의 서울 엑서더스(대탈출)에는 국가경제의 바탕이 되는 정부보유 금은의 반출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하마터면, 당시 한은에 보관중인 1t반(현싯가 12억8천1백만원)의 지금
-
(27) 가장길었던 3일(27)|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북괴군이 서울을 점령하기전에 제일먼저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이 미국거류민들이었다. 6·25가 나기 1년전인 1949년6월21일에 이미 미극동군사령부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4백80명의
-
(23)「6.25」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가장 길었던 3일(23)
적의 침공을 맞아 각 전선의 전세가 모두 우리측에 불리할 때 유독 춘천시를 방위하고 있는 김종오 대령(고인)의 제6사단만은 용전분투하여 적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원주에 CP를 둔
-
독단으로 외로 와진「닉슨」애그뉴·로저즈 등 소외로
【워싱턴 14일AP동화】「닉슨」미국 대통령은 최근의「캄보디아」진격 명령을 결정한 것을 비롯, 여러 중요문제에서 각료는 물론 일반 국민들로부터도 소외당한 외로운 처지였다는 사실이 밝
-
(14)가장 길었던 3일(14)|「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6월25일 아침부터 28일 새벽 2시반에 한강다리가 폭파될 때까지 서울시경 산하의 5천여 경관이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당시의 몇 시경찰관들의 증언을 통해 다시 알아보자. ▲이계무씨(
-
(13)가장 길었던 3일|「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김태선 서울시경국장은 25일 새벽 5시반쯤에 필동 자택에서「무초」미대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둘 사이는 워낙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운 데다가 직책상 수시로 정보를 교환하려고 직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