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932)제34화 조선변호사회(7)|정구영

    초기에 변호사가 되려면 대개 구한국시대 및 통감부의 판·검사를 지낸 자이거나 대한제국이 실시한 변호사시험(단2회로 끝이 났다)에 합격한 자 또는 법부의 서기관 출신관료나 일본의

    중앙일보

    1973.12.22 00:00

  • (928)제34화 조선변호사회(3)

    3·1만세사건으로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계속 정국이 소란하자 당시 전수학교 당국은 3월3일부터 실시키로 예정했던 졸업 시험을 늦추고 미루다가 나중에는 이를 포기하고 그대로 졸

    중앙일보

    1973.12.18 00:00

  • (908)| 종로 YMCA의 항일 운동 (18)|전택부

    1913년3월 어느날 이른 아침이었다. 무장 경찰이 YMCA 정문 앞을 삼엄하게 수비하는 가운데 중국인 들장이들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황성 기독교 청년 회관 간판 중 「황역」

    중앙일보

    1973.11.24 00:00

  • 국립중앙도서관이라는 것

    여의도로 옮기기로 한 국립중앙도서관의 신축계획은 아무래도 일단 백지화하는 것이 좋겠다. 그 첫째 이유는 관계 당국자가 새로운 국립중앙도서관의 건설에 관해 아직 아무런 뚜렷한「비전」

    중앙일보

    1973.09.28 00:00

  • 이우적 통해서 박 만나러 상경했으나 라이벌파인 이정윤 아지트로 안내돼

    죽창훈련을 받으러 가는 틈을 타 도망칠 기회만 느리다 해방이 됐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한동안 멍했다. 그러나 기뻐할 수 만은 없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밤 늦게 동네에 돌아와보니 동

    중앙일보

    1973.04.11 00:00

  • (702) 내가아는 박헌영(20) 박갑동

    신문기자시대 동아일보 기자로 있던 박헌영은 1924년 9월께 조선일보로 일자리를 옮겼다. 그무렵 송병준이 경영하던 조선일보는 경영난에 빠져 동아 영업국장으로 있던 홍증식이 신석우의

    중앙일보

    1973.03.07 00:00

  • (701)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9)

    신흥청년동맹소속의 대표적인 연사로 순회강연에 참가하는 등 사회주의운동에 한창 열을 올리던 박헌영은 1924년 4월15일 동아일보사에 입사했다. 그가 취직을 해보기란 이때가 처음이었

    중앙일보

    1973.03.06 00:00

  • (689)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7)고보졸업 전후

    3·1만세운동이 이곳 저곳에서 연일 계속되고 학생들은 닥치는 대로 일경에 붙잡혔다. 이 때문에 어느 학교거나 졸업식을 가질 수 없었다. 박헌영이 다니던 경성고보(현 경기고교)도 그

    중앙일보

    1973.02.20 00:00

  • (35)농아에 심는「일자승천 금」|진해 농아학원장 김무현씨

    『벙어리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가슴을 치며 겨우 짜내는 진해시 농아학원(장천동372) 김무현 원장 (54)의 절규다.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 벙어리는 교육을 받으려고 애쓴다. 그

    중앙일보

    1972.06.10 00:00

  • (354)발명학회(8)|목돈상

    그 동안 김용관씨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했다. 사실 김용관씨처럼 발명학회나 과학 지식보급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사람은 따로 없었다. 1924년 10월1일 발명학회가 장사동의

    중앙일보

    1972.01.12 00:00

  • (307)미·소 공동위원회(19)제21화|문제안(제자는 필자)

    김선유씨가 펜으로 써서 마련한 가 협정문서는 6·25 때 없어져 버렸다. 이 협정에서는 차편이 있을 때 우편물을 교환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어느 사이엔가 1주일에 1회씩 교환되고

    중앙일보

    1971.11.15 00:00

  • (284)전문학교(12)|김효연(제자는 필자)

    일본의 군국주의가 193l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다음해에는 청말 최후의 황제인 오의를 옹립하여 괴뢰 만주국을 수립하는데 성공하자 이 같은 사실은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에도 영

    중앙일보

    1971.10.19 00:00

  • (277)전문학교(5)-김효록

    평양이 예로부터 산자 수명하고 풍광이 명미하며 절세의 미인들이 많아 색향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이 밖에 산업도시·종교도시·교육도시로도 전통을 지닌 곳이었다.

    중앙일보

    1971.10.11 00:00

  • (268)제19화 형정반세기(11)

    30년대 말부터 일본어 사용 등 강력한 동화정책을 편 일제가 마지막으로 우리의 말과 글, 얼의 말살을 꾀했던 사건으로 조선어학회사건을 손꼽을 수 있다. 37년부터 일본천황에게 충

    중앙일보

    1971.09.29 00:00

  • (219)제15화 자동차 반세기(13) 서용기

    만주사변은 한참 꽃필 단계의 우리 나라 운수업계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특히 「트럭」은 군장비취급을 받았다. 함경도·평안도지방에선 자가용·영업용 할 것 없었고 심할 때는 운전사

    중앙일보

    1971.07.30 00:00

  • (218)|자동차 반세기|서용기(제자는 필자)

    1927년께의 일이라고 기억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운수행정당국을 비판하는 운수업자들의 공개성토대회가 열렸다. 철도국이 역 주변의 화물운송업자를 대폭 경비하여 일역일업자 주

    중앙일보

    1971.07.29 00:00

  • (213)자동차 반세기|서용기(제자는 필자)

    1920년대부터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 나라 운송사업은 처음으로 개화기이자 경영시대로 접어들었다. 특히 승합 「버스」업은 1919년 말부터 호경기를 맞아 사업이 잘 된다

    중앙일보

    1971.07.23 00:00

  • (197) |무역…8·15 전후|전택보

    지나 사변에 이어 「유럽」에서는 전운이 높아지고 마침내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서 우리가 해방을 맞기까지의 5, 6년간은 소위 「천진 무역」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물론 이때에도

    중앙일보

    1971.07.05 00:00

  • (196) |무역…8·15 전후 (5)|전택보

    만주 사변 후, 그러니까 한반도에 이어 무대를 대륙으로 옮기면서 일본은 조선 무역 협회를 설립했다. 합방 직후에 생긴 경성상공회의소가 주동이 돼서 1933년4월 당시 한국에 와있

    중앙일보

    1971.07.03 00:00

  • 남기고싶은 이야기들(186)방송 50년(15)이덕근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총독부는 한국의 저명한 인사들을 방송국 「마이크」앞에 끌어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때 방송국에 끌려나온 사람이 읽는 원고는 물론 자신이 쓴 원고도 아니며 사

    중앙일보

    1971.06.22 00:00

  • (99)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6·25동란 당시의 주일공사는 김용주씨였다. 김용주씨는 대한해군공사 사장으로 있던 것을 신흥우박사가 주일대사를 사임하자 허정 교통부장관의 추천으로 외교관이 된 사람이었다. 김 공사

    중앙일보

    1970.08.31 00:00

  • (36)해방에서 환국까지

    진왕자가 세상을 떠난지 꼭 10년만인 1931년12월29일에 둘째 아들 구왕자를 낳았다. 일본의 황실전범에 의해서 양자제도가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세자가 없으면 왕가는 자연 단절될뿐

    중앙일보

    1970.06.17 00:00

  • (4) 강릉국민학교

    상투올린 머리에 풀 갓을쓴 10명의 학도가 정헌시군수영감을 앞세우고 강릉읍내를 누볐다. 15살부터 25살 까지의 이들중 2, 3명의 허리춤엔 곰방대가 꽂혀있었다. 이들은 저마다『새

    중앙일보

    1968.05.04 00:00

  • (76) 역사의 고향(35) 두 고옥의 종언

    서울의 명물 고옥 두 채가 헐린다. 1910년대의 출산들. 경성도서관(현 시립 종로도서관)이 곧 문을 닫고 조선「호텔」은 이미 지난 6일 폐업했다. 「경성」이 겨레의 자랑이었으면

    중앙일보

    1967.07.2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