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508)|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35)|곽상훈

    (10) 이 박사는 장면박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장 박사가 그와 대립할 아무 일도 없는데도 말없이 그를 떠나 최초의 도전자가 되었다는데서 배신감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이 아닌

    중앙일보

    1972.07.12 00:00

  • (503)|(130)|경무당 4계 서록|곽상동

    이 박사를 통렬히 비난하고 부통령자리를 물러난 인촌은 한민당을 이 박사에 대항하는 보다 큰 야당으로 키우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민국당을 필두로 의회 내 야당세력을 합쳐 민주당

    중앙일보

    1972.07.06 00:00

  • (499)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26)|곽상훈(제자 윤석오)

    ①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으뜸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항상 내세웠다. 그는 그의 뜻이 항상 국민의 뜻과 일치한다고 믿고있는 듯했다. 그는 일제하에서 깨지 못한 이 나라 민중을

    중앙일보

    1972.06.30 00:00

  • (492) |내가 아는 이 박사-경무대 사계 여록 (119)|임영신

    내가 이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23년 관동 대 진재 때 일본이 우리 한국인에게 저지른 만행을 담은 「필름」을 이 박사에게 전달하려고 처음 미국에 갔을 때이다. 이 박사와의

    중앙일보

    1972.06.22 00:00

  • 개인지도 꼭 무인가 학원으로 보아야 하나|「가정주부 피아노 교수」형사처벌의 파문

    집에서 어린이들을 모아 「피아노」개인지도를 해온 가정주부가 사설강습소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벌금 1만원을 물도록 약식 기소된 사건은 앞으로 음악·미술·무용·서예 등 각종 예능과목과

    중앙일보

    1972.06.21 00:00

  • (488)제26화 내가 아는 이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15)|임병직

    이 박사가 일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었다고 흔히들 말하고 있지만 이 박사는 사실「감정」이라기 보다는 그의 고집에서 나온 일관된 어떤「정책」을 가졌었던 것 같다. 이 박사는

    중앙일보

    1972.06.17 00:00

  • (482)|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 4계 여록(109)|장기영

    미군의 일원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던 나는 해방을 맞아 군복을 걸친 채로 그해 10윌 초에 고국의 땅을 밟았고 이 박사는 10월16일에 환 국을 했다. 나는 주둔군 사령관인「하지

    중앙일보

    1972.06.10 00:00

  • ⑩서산대사(이조)|김동화(동국대 대학원장·철박)

    서산·사명하면 임진난을, 또 임진난하면 이양대사를 연상할 만큼 이들은 승병대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장이라 하면 그 성격이 과격하리라, 그렇다면 도인과는 거리가 멀 것이 아닌가

    중앙일보

    1972.06.02 00:00

  • (471)경무대사계(98)|우제하

    (중) 『국민이 아직 살아있구먼.』 이 한마디로 이박사의 의중은 헤아릴 수 있음직 했다. 그러나 장관들은 그런 이 박사에게서 오히려 노 애국자다운 모습을 저린 마음으로 읽었을지도

    중앙일보

    1972.05.29 00:00

  • (34)「30대 주체」쉴 날이 없다|전북 고창 문화원장 이기화씨

    취미가 「주례를 맡는 일」이라는 전북 고창군 고창읍 고창문화원장 이기화씨(38). 주례치고는 너무 젊은 나이였다. 그러나 15년 동안 남의 궂은 일, 어려운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중앙일보

    1972.05.27 00:00

  • "동심 멍들게 한 교사·사회 책임"

    이에 대해 윤태림교수는『이같은 비극은 금전만능과 사랑이 결핍된 사회의 풍조에도 원인 이 있으나 교사가 전적인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하고 학생수가 많아 교사가 학생 개개인을 돌보지

    중앙일보

    1972.05.23 00:00

  • (2) 고교 입시의 부작용

    『개인이 능력껏 공부하겠다는데 왜 과외 공부를 강제로 못하게 합니까?』-. 각 중학교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거의 이러한 불평을 말한다. 한국 교육계의 「정상화」를 막는 가장 큰

    중앙일보

    1972.05.18 00:00

  • (460) | 경무대 사계 (87)|김상래

    이 박사는 물가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쌀값 걱정 때문에 쌀값이 오를 때마다 농림장관을 경질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박사는 가끔 틈나는 대로 남대문 시장 등에 직

    중앙일보

    1972.05.16 00:00

  • (32) 석각에 쏟은 정열 40년|전북 익산 황등석 공장주 김삼득씨

    돌을 쪼고 매만지는 고달픈 석공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전북 익산군 황등면 황등석 공장주인 김삼득씨 (58) 다른 사람들은 김씨가 돌과 싸워온 정력을 딴 일에 바쳤다면 벌써 큰 재산

    중앙일보

    1972.05.15 00:00

  • 제4회 신사임당 상 받는-김갑순 여사

    주부「클럽」연합회는 제4회 신사임당 상 수상자로 이대 문리대학장 김갑순 교수를 선정, 발표했다. 성악가 채선엽씨, 서예가 이철경씨, 수예연구가 나사균씨에 이어 『예술활동을 하는 본

    중앙일보

    1972.05.11 00:00

  • |(452)제26화 경무대 사계(79)

    대동아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니까 지금 생각하면 1932년이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 할아버지로부터 소포가 도착했다. 거기서 이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결혼 사진이 나왔다.

    중앙일보

    1972.05.06 00:00

  • 옛 한글 서간 판독의 문제점

    요즘 문화재 애호정신이 고조되어 일반인·학자·매스컴 등이 모두 협력하여 발굴과 고증과 소개 작업을 활발히 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민족문화 발전을 위해 다행한 일이다. 이번 2백53

    중앙일보

    1972.05.05 00:00

  • (448)제26화 경무대 사계(75)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발효하게됨에 따라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대부분이 철수를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미국을 방위조약으로 묶어놓고 동북아군사동맹을 만들어

    중앙일보

    1972.05.02 00:00

  • (444)경무대사계(71)황규면

    「로버트슨」특사의 방한으로 대충 작성됐던 한·미 방위조약은 그후 빈번한 절충을 거친후 8월8일 경무대에서 가조인 됐다. 휴전협정이 조인 된지 9일 만인 8월5일「존·F·덜레스」미

    중앙일보

    1972.04.27 00:00

  • 미 하버드대 「케네드·키넌스」씨

    한국인도 보기 어려운 우리의 족보들만 중점 연구하는 이색 미국인연구가가 있다. 한국사를 전공,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케네드·키넌스」씨(28)는 지난해 9월

    중앙일보

    1972.04.04 00:00

  • (422)경무대 사계(49)황규면

    김포에서 비행기를 내려 자동차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는 길은 홍진만장이었다. 90일간의 전쟁이 남긴 상흔은 말할 것도 없고 화약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비록 폐허뿐이지만 옛집을

    중앙일보

    1972.03.31 00:00

  • (419)(46)황규면

    이대통령이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 우리는 신 국방장관으로부터 한강방위선이 무너져 공산군이 수원을 향해 물밀 듯 내려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미24사단의 선발대인「스미드」기동부대

    중앙일보

    1972.03.28 00:00

  • (386)경무대사계|윤석오(제자는 필자)

    이화여전 출신 여류의 모임인 낙랑 클럽의 「유엔」한위 환영 「파티」에서 「메논」이 모윤숙 여사에게 매혹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 박사는 직접 모씨에게 전화를 걸어 「메논」을 잘 구워

    중앙일보

    1972.02.18 00:00

  • (385)경무대사계|윤석오(제자는 필자)

    이화장을 구하자 날씨도 추워져 부랴부랴 몇 군데만 손질을 한 뒤 서둘러 이사했다. 이 수리 때 방을 뜯어 서양식부엌으로 개조하고 구들장을 뜯어 두었다. 둘 곳이 마땅치 않아 황비

    중앙일보

    1972.02.17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