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한진」에 협박 전화

    폭발물사건이 난 한진 고속 서울사업소 (중구 봉래동1가132의4)에 13일 하오 7시50분쯤 협박전화가 걸려왔다. 안내양 하영숙씨(26)가 전화를 받자 30대 가량의 서울말씨를 쓰

    중앙일보

    1972.04.14 00:00

  • 무법4년…국제밀수|「억대밀수」수사서 밝혀진 그 조직과 수법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 국제밀수조직은 지난 4년 동안 활개를 쳐 왔음이 수사결과 드러나고 있다. 청와대 사정보좌관실과 검찰 합동수사 반이 적발한 이번 밀수사건은 그 조직이 국제적인데

    중앙일보

    1972.02.26 00:00

  • 탈선 변호사 또 2명 구속

    탈선 변호사에 대한 일제 수사를 벌이고 있는 서울지검 감찰부 김정기·김도언 검사는 5일 하오 사건 「브로커」를 통해 국가 상대의 소송 등을 부정하게 맡은 배동학 변호사 (48·서울

    중앙일보

    1972.02.07 00:00

  • 1971년 주요사건 일지

    71년은 국내·외적으로 격동 속에 저물었다. 안으로는 양대 선거를 치렀고, 안보문제가 크게 「클로스 업」되었다. 10월 중공의 유엔가입은 국제정치질서의 개편을 가져왔고, 우리에게도

    중앙일보

    1971.12.30 00:00

  • (260)|거창사건(1)|「건벽청야」작전(1)|6·25 21주 3천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1951년1월의 한국전세는 전후방을 막론하고 누가 보더라도 우리편에 몹시 불리했다. 전선을 보면 서울을 무혈 점령코 한강을 도하한 중공대군은 계속 남하하여 오산·제천·영월·삼척 선

    중앙일보

    1971.12.01 00:00

  • 국회예결위 정책 질의·답변 요지

    ▲송원영 의원(신민) 질문=북괴의 남침이 금시에 있을 것 같이 선전하여 국민은 불안의식을 느낀다. 이를 통해 국민을 통제하려는 것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수도권방위문제를 새삼스레

    중앙일보

    1971.11.29 00:00

  • (256)|「「맥아더」원수 해임(5)

    유럽」제일주의(2) 「트루먼」대통령이 11월30일에 행한 『원자탄성명』의 불발로 「맥아더」의 확전안 실현은 영 가망 없게 됐지만 그래도 노병은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

    중앙일보

    1971.11.22 00:00

  • (255)|맥아더 원수 해임(4)|유럽제일주의(1)|6.25 21주 3천여 증인 회견. 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미국외교정책의 기본은 원래가 『유럽제일주의』이지만 아시아에서 한국전쟁을 치르면서도 워싱턴의 그런 정책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트루먼과 맥아더와의 대립도 근원은 워싱턴의 유럽제일주

    중앙일보

    1971.11.19 00:00

  • (254)|맥아더 원사 해임(3)

    웨이크도 회담의 성격이나 목적에 대해서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원사는 서로 상반되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전자는 맥아더가 마땅히 워싱턴에 와서 대통령에게 군무를 보고해야 되지만 하

    중앙일보

    1971.11.17 00:00

  • (253)맥아더 원수 해임(2)|웨이크 토 회담(1)

    맥아더 원수의 대만방문이 가져온 파문이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이와 비슷한 사건이 같은 8월에 일어났다. 고익 보수 색채가 짙은 미 해외참전재향군인회(Veterans of Forei

    중앙일보

    1971.11.15 00:00

  • (240)「유엔」군의 총퇴각(13)|「1·4」후퇴(1)

    1950년 12월5일에「유엔」군이 평양을 포기하고 후퇴를 계속하자 서울시민들은 본능적으로 부 안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6·25초에 겪은 악몽이 되살아나 다시 전

    중앙일보

    1971.10.15 00:00

  • (226)남과 북의 포로수용소(18)|거제도 폭동(4)

    「헤이든·보트너」준장이 구상하고 있는 제2단계인 새 수용막사의 건조는 한달이 걸렸다. 이 동안 「보트너」 준장은 매일 어느 수용소에서 폭동이 얼어나지 않을까 하고 내심으로는 식은땀

    중앙일보

    1971.09.10 00:00

  • (224)|거제도 폭동(2)|남과 북의 포로 수용소(16)

    미군이 공산포로를 다루는데 있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일반포로」와 「투항귀순자」를 구별하지 않고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과 같은 이념 전에서는 이 두 가지 개념은 엄격히

    중앙일보

    1971.09.06 00:00

  • "상황 판단·보고 과정에 이상이었다"

    군 특수 범 난동사건을 규명하기 위한 국회 국방·내무위원회 합동조사반은 27일 난동발생지인 인천 앞 바다와 실 미 도에서 인천·부평·소사를 거쳐 서울 대 방 동까지의 침입경로를 현

    중앙일보

    1971.08.28 00:00

  • 교신두절 왜「체크」안 했나…특수범 부상자 사살 설 있다|소위 자칭한 김종철은 민간인…자폭 아닌 폭사였다

    조 일환 의원(신민)질의=특수 범들이 섬을 탈출해서 서울에 침입할 때까지 7시간40분 동안 경비진은 뭘 했는가. 도대체 무장공비로 발표했다가 특수 범의 소행으로 정정 발표한 것은

    중앙일보

    1971.08.25 00:00

  • 「타이밍」

    어제 분수대는 군대에 가장 중요한 세 가지「S」를 말했다. 여기 하나 더 추가할게 있다. 시간 즉「타이밍」이다.「타이밍」은 현대의 각종 전투에서 더욱 세밀해지고 더욱 중요한 요소로

    중앙일보

    1971.08.25 00:00

  • 구멍난 수도권 방위|군·경의횡적연락늦은 「 8·23난동」처리

    23일 한낮, 공군관리하의 특수범죄자들이 저지른 집단난동은 활극영화에서나 상상해 볼만한 끔찍한 광란극이었다. 특수부대 경비병 14명이 죽고, 민간인·경찰등 7명이 피살된 이 난동사

    중앙일보

    1971.08.24 00:00

  • 군특수범,경인지역서 무장난동

    인천앞바다 실미도에 수용중이던 공군관리하의 특수범24명이 23일 아침6시쯤부터 무장난동을 일으켜 경비원23명중 14명을 사살하고 섬을 탈출, 인천 송도로 상륙하여 민간인「버스」를

    중앙일보

    1971.08.24 00:00

  • 인책만으로써 끝날 일이 아니다

    23일 오후,일서의 수도권 한복판에서 피투성이의 총격전을 벌임으로써 온 국민을 놀라게 했던 이른바 「배괴무장공비침투사건」 온 당국의 상황판단착오로 빚어진 군특수범들 난동사건으로 밝

    중앙일보

    1971.08.24 00:00

  • 공비 20여명 경인도로 따라 서울 침투

    대간첩대책본부는 23일 하오 1시10분 북괴무장공비 21명이 인천 남구 송도 조개고개로 침투, 군인과 교전한 후 민간「버스」를 빼앗고 부평과 소사를 거쳐 하오 2시쯤 노량진 유한양

    중앙일보

    1971.08.23 00:00

  • 구구한 억측… 고령자 사퇴

    내무부는 요즈음 인사이동을 앞두고 50세 전후의 고급공무원으로부터 『참신한 후진을 양성한다』는 등의 구실로 사표를 받고있어 내무부본부 뿐만 아니라 각시 도에 이르는 지방관청이 몹시

    중앙일보

    1971.08.05 00:00

  • (199)38선 돌파와 북진(15)

    (상) 「유엔」군이 북한에 진격하여 수복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이 지역의 행정을 어떻게 실시하느냐가 큰 문제로 대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북의 수복지역은 의당 대한민국의 관할에 속

    중앙일보

    1971.07.09 00:00

  • (190)방송 50년(19)이덕근

    방송국에서 일본사람들이 완전히 떠난 것은 45년 10월 2일이었다. 진주한 미군은 38선 이남의 10개 방송국을 접수했는데 이에 따라서 방송내용이 미군에 의해 조정되었다. 미군은

    중앙일보

    1971.06.26 00:00

  • (185)|38선 돌파와 북진(1)|월경 논쟁(상)|6·25 20주…3천 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유엔군은 9월말까지 38선 이남에서 대체로 북괴군을 일소하였다. 10만 침략군은 3개월만에 궤멸되어 불과 2만여 명의 패잔병력만이 38선을 넘어 북으로 후퇴했다. 이제 문제는 유엔

    중앙일보

    1971.06.07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