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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29)
(29) 美군정청의 보복 홍명희선생을 따라 48년 4월 북한에 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았던 연희대학생 전영철의 소식은 전쟁이 끝난 한참 뒤에야 들었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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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27)
(27) 분단의 서막 윤치영 비서실장은 이승만 박사 비서직을 내게 제의했지만 나는 거기 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정 (單政) 수립을 향해 달려가는 李박사 측에 가담한다면 내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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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23)
(23) 인민보사 습격 도도히 흐르던 반탁 (反託) 의 물줄기는 1946년 접어들자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했다. 1월 2일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가 '탁치 (託治) 를 을사조약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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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22)
(22) 이박사와의 만남 그날은 몹시 추웠다. 신탁통치 결정소식이 전해진 뒤 이틀이 지났고 내가 연희교정에 '반탁 (反託) 모임' 격문을 붙인 지 하루가 지난 1945년 12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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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21)
(21) 反託운동 앞장 해방의 감격 만큼이나 뜨거웠던 날씨가 가을 바람에 밀려나기 시작한 1945년 9월 중순. 수형 (受刑) 생활의 후유증을 어느정도 떨궈냈다 싶던 무렵인데 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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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20)
(20) 비련의 첫사랑 해방의 기쁨을 뒤로 한 채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가 새로 마련한 종로구 관철동 집에서 며칠동안을 누워만 지냈다. 어머니의 따뜻한 간호가 힘이 되긴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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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9)
(19) 다시 찾은 자유 1945년 4월 하순. 체포된 지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경찰은 '배후 조직' 을 캐보려 혈안이 되었지만 내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게 없으니 수사도 진전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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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7)
(17) 송도中 무기고 탈취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 나는 송도중학교 6학년으로 졸업반이었다. 말썽꾸러기 아들을 객지에 둔 부모님은 '물 가의 갓 난 아기' 처럼 걱정이 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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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6)
(16) 북청 꼬마주먹 나는 파인 (巴人) 김동환 (金東煥) 의 시를 지금도 애송 (愛誦) 한다. 특히 '북청 (北靑) 물장수' 를 가장 좋아한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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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5)
(15) 38세 외무장관 64년 7월초 서울에서는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몰려오고 있었다. 반도호텔에 여장을 푼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급히 귀국하라' 고 지시했던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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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4)
(14) 美인맥 구축 밀명 63년 11월24일 케네디 美대통령 장례식 참석차 하네다 (羽田) 공항에 일시 기착한 朴대통령은 내게 두 가지를 지시했다.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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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3)
(13) 제5대 대통령선거 개표가 한창이던 63년10월16일 새벽은 공화당측에게는 악몽같은 시간이었다. 윤보선 (尹潽善) 후보와는 이미 10만여 표차가 났고 박정희 (朴正熙)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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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2)
(12) 립스틱 사건 朴대통령이 버거 미국대사, 하비브 참사관과의 만찬을 주선토록 지시한 것은 대선 (大選) 을 불과 보름여 남긴 1963년 9월 말이었다. 나는 이 행사가 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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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1)
(11) 비서실장직 사임 63년 5월. 청와대 비서실장직을 그만 두기로 결심한 나는 朴대통령에게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몇차례나 기회만 엿보다가 번번히 때를 놓치곤 했던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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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0)
(10) 하비브와의 공조 63년 4월 초 어느 날. 예정시간보다 일찍 청와대에 도착한 버거 미 대사는 곧바로 2층 내 방부터 들렀다. 朴대통령에게 직접 케네디의 친서 (親書) 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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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9)
(9) 케네디친서 63년 3월의 정국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정치권과 대학가의 잇따른 반대시위에 맞서 군에서는 오히려 군정연장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3월 22일, 마침내 군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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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8)
(8) 미국의 반대성명 63년 3월 14일 밤. 버거 대사와의 만찬 도중 朴대통령이 폭탄선언을 하는 바람에 그만 집으로 돌아와 버린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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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7)
(7) 군정연장 선언 63년 3월 14일 저녁 정동 미 대사관저. 만찬이 시작되자 朴대통령과 버거 대사가 헤드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을 중심으로 나와 김재춘 (金在春) 중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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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5)
(5) 박대통령의 고민 62년 가을 어느날 퇴근 무렵.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이 '술이나 한잔 하자' 며 내게 전화를 해왔다. 몇분 후 수행원도 없이 청와대에 온 그는 혼잣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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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4)
(4) 육영수 여사 62년 4월 청와대 비서실장에 취임한 뒤 나는 장충동 공관으로 인사를 갔다. 취임 인사도 인사려니와 무엇보다 육영수 (陸英修) 여사를 만나 朴대통령에게 청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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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3)
(3) 청와대 비서실장 5.16 한달쯤 뒤였을까. 하루는 경향신문 정치부 김경래 (金景來) 차장이 집으로 찾아와 '쿠데타에 대한 논평' 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를 한마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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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2)
(2) 국방대학원 강의 나는 이미 61년 초부터 쿠데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듣고 있었다. 국방대학원 강의를 통해 알게 된 군인들과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여러 차례 그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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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1)
(1) 박정희와의 만남 1961년 4월 어느날 무교동 일식집 이학 (二鶴) .김동하 (金東河) 해병 소장이 바쁜 걸음으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이어 작은 체구에 얇은 스프링 코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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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 국제집행위원회 개최
태평양아시아협회(이사장 孔魯明)가 27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아시아사회의 역동성 재건과 청년의 역할' 을 주제로 태평양아시아 네트워크 (PAN) 국제집행위원회를 개최했다. PAN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