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워싱턴과의 논쟁 (1)|인천 상륙 (3)|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해리·S·트루먼」미 행정부가 북괴의 남침 후 한국 문제에 관한 정책을 우선 결정하고 그 후에 「유엔」의 추인을 받은 것과 비슷한 경우가 실제 전쟁 지휘에 있어서 현지 군사령관인
-
(중) 20년만의 추파와 실리외교의 파장
중공 「유엔」가입안에 극적 전기를 가져온 총회표결을 앞두고 등장한 「유엔」본부회의장에서는 예년과 다름없이 중국대표권에 관한 토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마감된 발언신청명단에는 이
-
이 의장 사회거부론
겸직의원처리문제를 둘러싸고 빚어진 이효상 국희의장과 공화당의 대립은 점차 격화하고 있다. 1일 상오에 열린 공화당의원총회는 이 의장의 독단적인 결정을 규탄하고 이 의장에게 『법사위
-
야의석 찾기에 바쁜 각료들
이틀째 국회의사일정을 합의한 12일 여-야 총무회담은 야당이 제기한 특별국정감사실시여부가 걸려 일진일퇴를 거듭 요즘 입버릇처럼「총무회담 무용론」을 펴 온 김진만 공화당총무는 운영위
-
(5)김종필
5·16혁명∼공화당 창당∼두 차례의 외유∼정계진퇴에 이르는 김종필씨의 파란에 찬 정치역정은 곧 집권공화당이 밟아 온 60연대역사의 영광과 오욕의 단층이었다. 『우리는 4·19와 5
-
팽창금융서 안정 금융으로
「닉슨」미대통령은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장 「월리엄·M·마틴」씨를 갱질, 후임에 「아더·F·번즈」대통령고문을 70년1월1일자로 임명했다. 이러한 미국연방은행 「리더」의 자리바꿈은 지
-
넓어진 주교의 참여범위|가톨릭 세계주교회의 성과
「카톨릭」교회를 새시대에 적응토록 하기위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임 시세계주교대의원회(Synodus)가 지난 10월11일부터 27일까지 「바티칸」시에서 열렸다 한국
-
「닉슨」의 두 「브래인」
「미시간」대학 경제학교수이며 「워성턴」에있는 미국기업연구소 학술자문위원장으로 오랫동안재임해온 「매크래큰」는 스스로「케인지언」이라고 가끔 말하는일이 있지만 그참뚯은 「케인즈」가 제기
-
71년 노린 첫발...「유진오체제」
신민당은 21일 전당대회에서 유진오씨를 당총재로 선출,「유진오체제」를 구축했다. 『효율적이고도 진보적인 정책으로써 대중과 함께전진하는 대중정당』을 표방하는 정강정책을 채택함으로써
-
의회경시의 경향
유진오신민당 대표위원은 20일 『박정희대통령이 경화한 여·야 관계와 국회사정을 이유로 국회에서 행하는 연두교서발표를 포기한 것은 국민과 국회를 경시하는 행정부의 독재화경향과 국회기
-
금가는 전열|신민 김성용씨의 이탈
「국회의원당선자의 등록거부」를 유일한 무기로해서 펼쳐져왔던 신민당의 6.8총선거 무효화투쟁은 당선자의 한사람인 김성용씨의 독단적인 전열이탈로 금이갔다. 단한사람의 이탈쯤은 투쟁에차
-
단독국회는 불법 서민호씨가 서한
서민호 대중당 대표위원은 10일 이효상 국회의장 앞으로 서한을 보내어『공화당이 단독국회를 운영하는 처사는 헌법과 국회법을 유린한 불법적이고 반민주적 행위로서 국민이 용납지 않을것』
-
단독국회예정대로.공화 부정시인 선행요구 신민
이효상 의장이 제의한 여.야협상준비회담을 신민당이 정식으로 거부함에 따라 공화당은 이미 정해놓은 예정대로 국회를 운영해나가기로 했다. 정부.여당은 10일하오2시 청와대에서 박정희
-
맥아더 장군
9·28을 맞을 때마다 수도 탈환에 선봉 섰던 해병들의 모습이 되 살아나고, 석 달만에 다시 꽂은 중앙청 옥상의 태극기가 새로이 고마워진다. 그러나 회고의 시선을 중앙청 꼭대기에서
-
사양하는 사람도 있어야…
○…민중당의 일부 소장당원들이 6월 9일의 전당대회에 앞서 6월 7일에 청년당원대회를 열고 당의 체질을 개선키위해 원로급 인사의 이선후퇴를 요구할 움직임은 당내에 큰 파문을일으키고
-
아쉬운「대중적기반」
한국의 대중은 「위대한지도자」에 기연를 걸어왔다. 그러나 대중의 기대는 충족되지못했고 정치는 안정된 토대위에 올라서지 못했다. 공화당에 있어 박정희 총재는 거의 부가역의 권위로 당
-
나의 증언(중)|4·26 이 대통령 하야성명에 관하여|김정렬
경무대에 도착하니, 이 대통령이 막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뒤를 이어 사무실에 들어가니 『잘 잤나?』평상시와 다름없는 음성이었고 밖의 일을 전연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상)4·26 이 대통령 하야성명에 관하여|김정열
1960년4월26일은 전 이승만 대통령이 그 때의 정정을 참작하여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것을 결심하시고 이 결심을 만천하에 성명 하신 근대사의 중대한 역사적 한「페이지」를 장
-
왜 올빼미 국회가 됐나|증파 동의안 강행 처리의 공과
국회는 증파 동의안의 본질적인 문제에서 보다 여와 야의 정략, 그리고 감정의 대립 속에서 철야 회의를 강행하였다. 공화당과 민중당은 국군의 월남 증파안을 올려놓고 19일 하오 2시
-
예기치 않던 소란…공천자를 내라
한때 잠잠했던 10월 원내요직 개편론이 지난10일 국회의장 공관에서 열린 여·야 총무단 회의에서 잠깐 화제에 올랐다가 여·야 총무들의 차가운 반응때문에 움츠러들고 말았다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