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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성명·적십자정신 입각 「가족찾기」에 최선|남북적십자 1차 본회담 개최, 합의문서 서명 30일 상오10시 「대동강 회관」에서

    【평양=30일 대한민국신문·통신 공동취재단】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을 찾아주기 위한 남북적십자 첫 본회담이 30일 상오10시 정각 대동강교 바로 옆에 자리잡은 대동강회관에서 역사적인

    중앙일보

    1972.08.30 00:00

  • 진통 1년만의 결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남북적십자본회담 개최의 큰길을 열고 예비회담을 매듭 지은 날, 지금까지 만1년 동안 예비회담을 치러온 남북쌍방 예비회담대표 및 관계자들은 서로의 노고를 치하

    중앙일보

    1972.08.11 00:00

  • 남북적, 서울서 첫 본 회담 열 듯

    【판문점=임시취재반】26일 상오11시 판문점에서 열린 제24차 남북적십자예비회담에서 8월5일에 열리는 첫 본 회담의 개최지를 논의, 한적측이 서울 개최를 제의한데 대해 북적측은 『

    중앙일보

    1972.07.26 00:00

  • 키신저-토, 비밀 회담

    【파리=장덕상 특파원】「헨리·키신저」 미 대통령 안보 담당 특별 보좌관은 19일 파리 회담 월맹 대표단 특별 고문 「레·둑·토」 및 수석 대표 「수안·투이」와 6시간30분 동안 비

    중앙일보

    1972.07.20 00:00

  • 「이산가족 찾기」…대화 모색 3백42일|남북적 본 회담 앞으로 보름…그 예비 회담 발자취

    남북적십자 본 회담이 오는 8월5일 드디어 그 막을 올리게 됐다. 분단 4반세기만에 7·4 남북 공동 성명과 함께 길고도 먼 대화의 길은 본격화되었다. 앞으로 보름 남짓-. 준비

    중앙일보

    1972.07.20 00:00

  • 양측의 본 회담 진행절차 제안내용

    일, 본 회담 의사 진행절차 ①회담참석인원은 대표와 수행원(지원요원제외)으로 하며 사전에 명단을 통고한다. ②회의는 원칙적으로 비공개로 하고 쌍방이 합의시 공개로 한다. ③발언은

    중앙일보

    1972.07.19 00:00

  • 일, 중공과 첫 외교접촉

    【동경14일 로이터동화】중공과의 외교관계수립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다짐한「다나까·가꾸에이」일본수상의 최근발언에 이어 일본외교관이 베푼 공식「리셉션」에 한 고위중공관리가 처

    중앙일보

    1972.07.15 00:00

  • 본 회담 대표단 구성에 합의

    【판문점=임시취재반】14일 상오11시 판문점에서 열린 제22차 적십자예비회담에서 남-북한 양측은 본 회담대표단의 수석대표(단장)를 쌍방적십자의 책임자 또는 부 책임자로 선정할 것에

    중앙일보

    1972.07.14 00:00

  • 분위기 한결 부드러워져

    【판문점=임시취재반】남북관계의 전환을 모색하는 7·4성명 후 처음 열린 제21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은 어느 때보다 분위기가 부드러워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이날의 회담장안에는 한

    중앙일보

    1972.07.10 00:00

  • 남북적 본 회담대표 7명씩으로

    【판문점=임시취재반】10일 상오11시 판문점에서 열린 제21차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에서 남북양측은 본 회담 대표를 각각 7명으로 구성할것에 합의했다. 7·4성명 후 처음 열린 이날

    중앙일보

    1972.07.10 00:00

  • 백20일만의 재 회합

    【판문점=임시 취재반】16일 상오 11시 판문점에서 열린 제20차 예비 회담은 2월17일 이후 1백20일만에 열린 탓으로 어느 때보다 많은 남·북 기자들이 참석, 회담장 주변에서

    중앙일보

    1972.06.16 00:00

  • 축배 들며 공동 휴식

    회의를 마친 양측 대표들과 수행원들은 낮 12시20분부터 1시25분까지 중립국 감독위 휴게실에서 공동 휴식을 가졌다. 김연주 한적 수석 대표와 김태희 북적 단장은 『본 회담 의제

    중앙일보

    1972.06.16 00:00

  • 남·북적, 본회담 의제 확정

    【판문점=임시취재반】남북적십자는 16일 상오 판문점에서 제20차 예비회담 전체회의를 열고 지난 5일 제13차 실무회의에서 타결을 본 본회담 의제를 확인하고 합의문서를 교환했다. 이

    중앙일보

    1972.06.16 00:00

  • 공산측 정치발언 중지 촉구

    【제네바=장덕상특파원】지난 3일 개막한 국제 적십자 인도법회의는 4일 본격적인 토의에 들어가 한국 교체 수석대표 박근 공사가 이날 발언했다. 이날 마지막으로 발언대에 나선 박 공사

    중앙일보

    1972.05.05 00:00

  • (309)-휴전회담의 개막(23)

    (2) 관계국 정부에 대한 권고를 다룬 제5항의 마지막 의제는1952년 2월 6일부터 분위가 아닌 본회의에서 토의되기 시작하였다. 휴전회담은 쌍방군사령관사이의 모임이기 때문에 협정

    중앙일보

    1972.03.31 00:00

  • (304)|휴선 회담의 개막 (18)|시험 휴전의 내막(1)

    1951년11월27일 휴전 회담 제28차 본회의에서 쌍방 수석 대표인 「조이」 제독과 남일은 그 동안 「헨리·호데스」 소장과 이상조 사이에 합의를 본 의제 제2항에 정식으로 서명하

    중앙일보

    1972.03.20 00:00

  • (301)휴전회담의 개막(15)

    공산측은 8월22일 밤중에 미 공군기가 개성회의장의 중립지대를 폭격했다고 주장했으나 조사결과 이는 전혀 허위날조임이 드러났다. 그들은 밤중에 급히 공동조사를 요구하여 급조증거물을

    중앙일보

    1972.03.13 00:00

  • (300)휴전회담의 개막(14)

    공산군의 중립지대 침범으로 6일간 중단됐던 휴전회담은 8월10일에 다시 열렸지만 남일의 태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날 공산대표들은 그들 회담전술의 장기인 「장광설」에다 「침

    중앙일보

    1972.03.10 00:00

  • (299)휴전회담의 개막(13)

    7월27일의 5개 항목의 의제채택에 이어 28일의 제12차 회의부터 「군사분계선」 구획문제 토의에 들어갔는데 예상한대로 쌍방은 팽팽히 맞서 끊임없는 논쟁을 벌였다. 이때부터 한국휴

    중앙일보

    1972.03.08 00:00

  • (298)휴전회담의 개막(12)

    (2) 의제결정은 7월16일의 제4차 본회의에서 약간의 진전을 보았다. 전일의 제3차 회의에서 공산측은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모든 외국군의 철수를 의제에 꼭 삽입해야 한다

    중앙일보

    1972.03.06 00:00

  • (297)휴전회담의 개막(11)

    (1) 「유엔」군 측 대표의 일원인 「아레이·버그」 제독이 근착 「리더즈·다이제스트」지에서 회고한바와 같이 미국은 늦어도 한 달이면 휴전회담은 끝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

    중앙일보

    1972.03.03 00:00

  • 남북 적 실무자회의 갖기로

    【판문점=임시취재반】17일 상오11시 판문점에서 열린 제19차 남북적십자예비회담에서 양측은 예비회담전체회의와는 별도로 「본 회담 의제문안 정리를 위한 실무회의」를 갖기로 합의했다.

    중앙일보

    1972.02.17 00:00

  • (291)휴전회담의 개막(5)-개성의 함정(3)

    「유엔」군 측 수석대표 「C·터더·조이」제독은 7월10일 오전의 제1차 본회의에서 쌍방의 개회사가 끝난 후, 해결해야할 첫 의제는 우선 토의를 한국과 군사문제에만 국한시키기로 하고

    중앙일보

    1972.02.16 00:00

  • (290)|휴전회담의 개박(4)|개성의 함정(2)|6·25 21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 한국휴전회담 제1차 본회의가 열리게 되자 온 세계는 낙관적 기분으로 들떴다. 전선의 「유엔」군 장병들은 이제 곧 고국에 돌아가게 되리라는 기대에 가

    중앙일보

    1972.02.14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