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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빈농을 끌어안아라”(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9)
◎토지개혁 상/「자작농 염원」겨냥 지지기반 확대 포석/무상몰수·무상분배,소작제도는 금지/곳곳서 소요… 땅 뺏긴 지주들 대거 월남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46년 3월6일 발표한 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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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권력장악,남북분단 재촉(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8)
◎「임시인민위」 설립/김,임정수립전에 북쪽 개혁 내세워/소 군정 간섭 안받고 독자 결행설도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결정으로 비롯된 혼란이 조금씩 가라앉을 무렵인 46년 2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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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욱목사집 폭탄투척사건(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6)
◎증언자 최의호씨/한밤에 수류탄… 아들·딸만 폭사/임정정치공작대 주도 「4인조」 침투/치스차코프집에도 의문의 폭탄/불길속 창문뛰쳐나와 “구사일생” 「3·1절 기념행사장에서의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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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계소군정 긴 투쟁의 서막(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5)
◎3·1절 장대현교회 신도 시위/예배중 소군 닥쳐 목사등 연행기도/평양 폭탄투척과 관련혐의/항의시위끝 줄줄이 잡혀가/증언자 박대선 전 연대총장 김두영 목사 46년 3월1일 평양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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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정치공작대 3명 밀입북(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44)
◎김일성 암살미수사건:하/2월중순부터 준비… 백의사서 지원/보안서원 따라 붙어 「거사」시간 놓쳐 김일성·강양욱·최용건·김책등 일파에 대한 암살 거사계획이 구체화된 것은 4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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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암살 미수사건: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3)
◎46년 평양역광장/3·1절행사때 날아든 수류탄/김 연설 끝나자 군중속에서 청년이 투척/소 경비장교가 주워던지려는 순간 “꽝”/증언자 김세일씨 신탁통치 찬·반폭풍으로 벌집 쑤셔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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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산계 포용 민정급조(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2)
◎공청의 변천과정:하/김일성의 대중화 요구에 국내파 굴복/소군정도 “공산 색깔 내지말라”/계급노선 주장한 오기섭 실권 45년 10월부터 그해말까지 약 3개월은 김일성의 빨찌산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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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청의 변천과정: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1)
◎김일성 대중기반잡기 “물밑작업”/「분국」창설 발맞춰 빨찌산파가 주도/우익단체들과 곳곳서 격렬한 충돌 해방의 환희가 아직은 거리마다 짙게 깔려있을 무렵인 45년 9월중순 비밀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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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내세워 김을 지도자로(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0)
◎김일성 선택과 소군부 역할:하/이승만 귀국알고 서둘러 입북시켜/토지개혁등도 김의 이름으로 추진 평양주둔 소 25군 사령부는 제1전선군 군사정치위원 스티코프상장의 「절대비밀」지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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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김」은 소극동군 작품(비록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39)
◎김일성선택과 소군부 역할:상/스탈린 총애받은 스티코프가 주도/김 입북 한달전 부하보내 정지작업 소련군정이 33세의 청년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선택한 과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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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위세력손잡고 사회주의로통일”(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8)
◎박헌영의 정치노선:하/소의 「찬탁」지지에 겉으로만 따르는 척/남쪽 정세 불리하자 김일성 지지 선회 해방후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박헌영은 남북의 「당중앙」위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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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의 정치노선: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7)
◎“해방직후 공산당재건 소와 합의”/8월18일 상경… 소 영사관과 극비접촉/광주서 지하활동 때부터 메시지 오가/증언자 고광표씨 쿨리코아씨 □특별취재반 북한부 김국후 차장 안희창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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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남한우익도 포섭하라”(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6)
◎박헌영김일성 6차회동:4/「남북연석회의」계기 남좌익 직접 지도/성시백 서울상주… 비밀조직까지 가동 박헌영의 월북은 남한좌익진영에 정치적 공백을 형성했다. 평양의 박헌영이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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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투쟁자제 합당전력 다짐(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5)
◎박헌영김일성 6차회동:3/“극좌노선은 미군정에 빌미 제공”/박,월북으로 2인자 전락/북,김일성시대 본격 개막 박헌영의 최종월북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민족주의자 대공산주의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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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월북시켜라” 밀사 급파(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4)
◎박헌영김일성 6차회동:2/김,박의 과격노선 “합당지장” 판단/붙잡히면 남조선공산당 끝장 우려 남한정국의 혼미와 미군정의 공산당탄압은 박헌영의 위상을 미묘하게변화시켰다. 권력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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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골격의 「합당그림」(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32)
◎박헌영김일성 5차회동:3/지지기반 확대 노려 대중정당 표방/비공산당에 대표 맡겨/김,백남운 등 면담 추진 46년 7월의 시점은 남북의 공산당에 변화를 강요하고 있었다. 북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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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박헌영-김일성 5차 회동 (2)|"여운형 포섭 공작" 미군정에 맹공
박헌영-김일성의 회동이 거듭될수록 권력의 축은 점점 더 김일성으로 기울어져 갔다. 현안 논의가 평양에서 전개됐다는 것도 그렇지만 회의 내용도 「박이 김의 의견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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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박헌영-김일성 5차 회동(1)|「좌우합작」문제 막판 절충
박헌영은 서울로 되돌아간지 나흘만인 46년7월말 다시 평양에 모습을 나타났다. 김일성과의 다섯 번째 회동을 위한 것이었다. 5차 회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45년10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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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박헌영-김일성 4차 회동(3)
46년7월, 남과 북에는 제2의 「좌익세력개편」이 전격 시작됐다. 김일성을 실세로 부상시킨 분국의 등장이 첫 개편이라면 북조선공산당의 조선신민당(신민당)과의 합당, 조선공산당과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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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좌우합작」큰 시각차(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8)
◎박헌영김일성 4차회동:2/박 “결국 미군정에 이용당한다” 김 “도와줘야”/주역인 여운형에 대한 평가도 갈려 박헌영의 평양걸음이 잦아지면서 북조선공산당 본부는 남한정치상황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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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사 위폐사건」집중거론(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7)
◎박헌영김일성 4차회동:1/“미군정에 탄압빌미 제공” 박헌영에 화살/개성코스 택해 박 입북/김일성 승용차로 영접 신탁통치결정의 후유증은 46년 중반기가 되면서 이남에 날로 복잡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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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개혁 전국확대 공방(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6)
◎박헌영김일성 비밀회동:4/국내파,지주많은 남조선은 완화주장/“찬탁운동 미지근” 박헌영에 호된비판 서울에서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한 박헌영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46년 4월5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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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감투놓고 계파 알력(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5)
◎박헌영김일성 비밀회동:3/간부자격·배분비율문제등이 초점/김일성 “빨찌산출신 우대” 뜻 비쳐 마찰 박헌영김일성 3차 회동은 소모적인 권력경쟁보다는 정치현안 실무논의라는 성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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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서 집착 핵소홀” 지적/남북총리회담 취재기자 방담
◎북,처음부터 서두르는 느낌/남 “양보 안하려면 그만두자”에 북 “다시하자”/7천만 겨레에 해방이후 최대 송년선물 준셈 이번 5차회담에서의 합의서 타결은 취재기자들조차 뒤늦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