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병 주고 약도 안주는 사학행정

    우리 속담에『병 주고 약 주고…』라는 말이 있거니와,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아무리 얌체 짓을 하는 사람도 자기 때문에 생겨난 타인의 병을 고쳐주어야 할 책임만은 면치 못한다는 뜻도

    중앙일보

    1971.11.27 00:00

  • (258)-(7)

    (2) 1951년 3월 24일에「맥아더」성명이 발표되고 이어 4월 5일에「조세프 마틴」의정이 하원에서 원수 서신내용을 낭독한 그 이튿날인 4월 6일에「트루먼」대통령은「애치슨」국무

    중앙일보

    1971.11.26 00:00

  • (257)「맥아더」원수 해임(6)

    (1) 1951년 3월 중순에 「트루먼」대통령은 한국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중대결정을 내렸다. 물론 이것은 「맥아더」가 주장한 것 같은 「완승」이 아니라 「유엔」동맹국의 의향에 따른

    중앙일보

    1971.11.24 00:00

  • 박대통령의 특별 명령

    박대통령은 15일 일부 대학생들의「데모」사태로 극도로 어지러워진 학원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경찰 및 군이 직접 개입할 것 등 9개항의「특별명령」을 관계장관에게 시달했다. 박대통령의

    중앙일보

    1971.10.16 00:00

  • 대학생과 군인

    육군 당국은 지난 5일 새벽에 일어났던 현역군인들의 고려대학교 난입사건에 관련하여 수도경비사 예하 제5헌병대대의 최동수 소령 외 22명(장교 16명·사병 6명)의 장병들을 영내에

    중앙일보

    1971.10.11 00:00

  • 길재호·김성곤의원 탈당|공화당 「10·2항명」징계 의원직자동상실

    공화당은 10·2항명에 책임을 지워 길재호 정책위의장과 김성곤 중앙위의장을 탈당토록 했다. 공화당은 두 의원이 자진해서 탈당했다고 발표했다. 두 당무위원의 탈당 계는 4일 소속지구

    중앙일보

    1971.10.05 00:00

  • (221)남과 북의 포로수용소(13)|「도드」준장의 피랍(2)

    「유엔」군 사령관직을「마크·클라크」장군에 인계하던 중 도드 준장 피랍사건에 직면한 「매듀·B·리지웨이」대장은 이 사건을 자기 책임 하에 단호한 태도로 해결할 결심으로 한국에 비래했

    중앙일보

    1971.08.30 00:00

  • 인신보호법안

    신민당은 13일 국민의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전문 14조로 된 「인신 보호 법안」을 마련하여 국회에 제출했다. 이 안의 내용은 ①일몰 후에는 피의자를 유치하거나 심문하는 것

    중앙일보

    1971.08.14 00:00

  • 15개 업소에 개선령

    서울시는 22일 인왕 실업(성동구 성수동2가277의101) 동 시내 15개 공해발생업소에 대해 오는8월말 안으로 모두 공해방지시설을 설치하거나 또는 공해방지 시설을 개선하라고 지시

    중앙일보

    1971.07.22 00:00

  • "이달 내 주차장 완비"

    서울시는 15일 주차장시설을 갖추지 않은 「프린스·호텔」(남산동2가 1의25), 동화상사 (을지로6가 145) 광일빌딩 (무교동 11) 등 20개 빌딩을 지적, 7월말까지 주차장시

    중앙일보

    1971.07.15 00:00

  • (199)38선 돌파와 북진(15)

    (상) 「유엔」군이 북한에 진격하여 수복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이 지역의 행정을 어떻게 실시하느냐가 큰 문제로 대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북의 수복지역은 의당 대한민국의 관할에 속

    중앙일보

    1971.07.09 00:00

  • 「알권리」수호한 호헌정신

    지난 7월2일에서 5일까지 나흘에 걸쳐 전문 연재된 바 있는 「뉴요크·타임스」사건처럼 숨막히는 긴장과 세계적 주시 속에 결정된 판례도 일찌기 없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 대

    중앙일보

    1971.07.08 00:00

  • (197) 38선 돌파와 북진 (13)|미 187 공정대 (하)|「6·25」21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

    10월21일 대동강을 건너 단숨에 근 1백리를 진격한 영국군 제27여단이 영 유리에서 야영을 하고 있을 때 북방에서 요란한 총성이 들려왔다. 이때까지도 영국군을 숙천에 낙하한 미1

    중앙일보

    1971.07.05 00:00

  • 언론 자유…그 역사적 승리|NYT·WP지 비록 게재 허용한 미 대법원 판결문 전문 (2)

    다음은 「인도차이나」전쟁의 근원을 다룬 국방성 문서의 「뉴요크·타임스」지와 「워싱텬·포스트」지 게재를 허용하는 미국 대법원 판결문 전문이다. 【워싱턴 AP동화=본사독점특약】 본관이

    중앙일보

    1971.07.03 00:00

  • (196)|38선 돌파와 북진(12)미 187 공정대 (상)|「6·25」21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며 평양으로 육박하고 있을 때 「맥아더」원수는 여의도 비행장에 「프랭크·S·보원」대령이 지휘하는 미187 공정 연대를 미 극동사령부의 유일한 예비 부대

    중앙일보

    1971.07.02 00:00

  • (176)연희고지 전투|「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 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1) 9월20일 새벽에 행주에서 한강을 건넌 미 제산 군단 산하 제1해명사단 5연대와 한국군 해병대는 이대로 진격이 순조로우면 22일께면 서울을 완전히 수복하리라고 예상했다. 「

    중앙일보

    1971.05.17 00:00

  • 심리전쟁

    미 국방성에서 밝힌 통계에 의하면 지금까지 월남참전미군에 수여된 훈장수가 2백만 개가 넘는다한다. 동성훈장만 해도 2차 대전 때보다 4만개가 더 많다. 한국 동란 때보다도 10배가

    중앙일보

    1971.04.30 00:00

  • 공산측, 월남휴전제의

    【파리29일로이터동화】월맹과 베트콩은 29일 속개된「파리」월남평화회담 제1백11차 본회의에서 미군에 대하여 사실상의 월남전 휴전에 들어갈 것을 촉구했으며 주월미군 전면철수일자를 정

    중앙일보

    1971.04.30 00:00

  • (167)「6·25」20주년…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인천상륙(10)|한국 해병대의 출동(2)

    한국 해병대는 미 제1해병 사단에 배속됐기 때문에 자연히 모든 작명이나 지휘를 미군으로부터 받았다. 인천에 상륙할 때에도 미 해병 다음으로 제2파에 끼여 올라갔다. 그러나 상륙이나

    중앙일보

    1971.04.26 00:00

  • 불량 전기용품의 추방

    불량전기용품에 대한 정비책이 당국에 의하여 여러 번 천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량전기용품은 사라지지 않고 있어 소비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경인지구의 경우, 전기

    중앙일보

    1971.04.23 00:00

  • 대학가의 정상화 기운

    교련 강화 반대, 학원의 자유 수호, 그리고 공명 선거를 부르짖는 「데모」때문에 격동하고 있던 대학가는 21일 연세대·고려 대를 비롯한 8개 대학이 수업에 들어감으로써 학원 정상화

    중앙일보

    1971.04.22 00:00

  • 서울대 문리·법대 임시 휴강

    서울대학교는 최근 잇따른 학생「데모」사태로 정상 수업을 할 수 없어 13일부터 문리대와 법대의 전과목 강의를 당분간 휴강한다고 발표하고 다른 단과 대학에 대해서는 일단 교수들이 적

    중앙일보

    1971.04.13 00:00

  • (161)|워싱턴과의 논쟁 (2)|인천 상륙(4)|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회의실의 분위기는 「맥아더」원수와 그의 몇 참모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인천 상륙에 반대였다. 누가 보아도 중과 부적으로 「맥」원수의 집념인 인천 상륙 안은 햇빛을 보지 못할 것 같았

    중앙일보

    1971.04.12 00:00

  • 소비자보호정책의 강화

    범람하는 불량상품으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상공부는 곧 국내에서 생산되는 공산품 중 35개 품목에 대해서 KS표시이행에 관한 행정명령을 발동할 것이라 하며, 이에 관련된 2백

    중앙일보

    1971.03.2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