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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 국군의 북상(상)
중동부 (다부동·안강·파계·포항전선) 에서 고전하던 한국군 각 사단도 대체로 9월 22일께부터 일제히 교두보를 박차고 배상의 길을 재촉했다. 북괴군 전선사령관 김책은 전선의 균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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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낙동강아 잘 있거라(2)|8군의 총반격(2)|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 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낙동강 교두보를 공격하던 북괴군 13개 사단은 9월16일부터 전개된 미 제8군의 총반격에 맞서 18일까지는 일진일퇴의 격돌을 되풀이했지만, 19일부터는 점차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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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6·25」20주… 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인천 상륙(11)|행주 도하
인천 상륙 후 파죽지세로 진격을 계속하여 김포 비행장을 점령한 미 제1해병사단 제5연대와 우리 해병대는 20일 행주 도하에서 비로소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이 행주 나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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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인천상륙(9)|한국 해병대의 출동(1)
인천상륙의 주력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7사단이었지만, 우리 한국군도 해병대1개여단과 육군 제17연대가 이 작전에 참가했다. 또한 미 7보병 사단에도 일본에 건너가 훈련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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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 실력 배양엔 참 좋은 날씨였다
『한국민은 정말 강인하고 훌륭합니다. 투철한 반공정신은 전세계가 본받을만 합니다.』미82공정사단장 조지·S·블랜처드 소장(42)은 4일하오 중앙일보 임시취재반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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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역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낙동강 공방전(25)|영천회전(3)
1주일에 걸친 영천회전에서는 적 제15사단 전부와 8사단 일부를 완전히 섬멸했다. 특히 적 제15사단은 분대장 급 이상이 모두 중공군 출신의 정예부대로서 8월 공세 때에는 미제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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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6·25 20주…3천여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낙동강 공방전(23)|영천회전(1)
북괴군이 마지막 안간힘을 기울인 9월 총공세 때 낙동강 교두보는 여러 곳에서 몇 번 아슬아슬한 위기를 겪었지만 그 으뜸가는 것이 영천이 뚫렸을 때였다. 지도를 보면 일목요연하게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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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대구 사수 (3)|낙동강 공방전(17)|「6·25」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대구 북방의 다부동 전투에서는 국군 제1사단 12연대장 직속 수색대의 활약이 컸다. 1사단이 열세한 병력과 장비로써 다부동에서 적대군의 맹공을 저지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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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16)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대구 사수(2) 대구 북방의 다부동 공방전은 몇 번 아슬아슬한 고비가 있었지만 8월18일에 그 첫 번째의 고비를 겪게 되었다. 이날 적15사단은 유학산으로, 13사단은 다부동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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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6.25」20주… 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낙동강 공방전(15)|대구사수①
북괴군이 낙동강교두보에 대해 8월과 9월 두 차례의 대 공격을 전개할 때 어디다 주공을 두었느냐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주공 없이 전 전선에 걸쳐 동시 포위공격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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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마산의 위기 (4)|낙동강 공방전 (14)|「6·25」20주…3천명의 증인 회견·내외 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
킨 작전에서 좌익을 맡은 미 해병대는 12일 아침 사천을 향해 진격을 재촉했다. 봉암리에서 적에 포위된 우군 포병대를 구출하려고 제3 대대가 그곳으로 차출됐지만 주력 부대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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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낙동강 공방전(11)|마산의 위기(1)|「6·25」20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마산 점령 부산 목 조르려
북괴군 제6사단이 호남일대를 휩쓸고 하동·진주에 진출하자 부산의 관문인 마산방어가 급하게되었다. 원래 적6사단은 중공군출신이 기간인 정예부대로서 남침 초에는 옹진·개성·김포·인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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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낙동강 공방전(9)|동부전선(6)|「6·25」20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3년|「한청」으로 유격대 조직
동부태백산지구는 지형상「게릴라」가 준동하기엔 안성맞춤인 곳이다. 북괴는 6·25전에도 도합 10차에 걸쳐 주로 남한출신의 유격대를 남파했는데 본격적인 남침 때에는 오진우좌(현 북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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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낙동강 공방전(4)
(1) 낙동강교두보의 최우단거점인 동해안 영덕에서는 북괴군이 8월 충공세를 전개하기 전에도 7월 중순이래 북괴 제5사단과 한국군 제3사단간에 일진일퇴의 혈전이 거듭되고 있었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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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낙동강 공방전 분초의 다툼(3)
유엔군이 낙동강교두보를 확보하면서 동시에 적의 허리를 끊는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북괴는 단하나의 승산인 부산점령을 목표로 이방면에 전력투구로 나왔다. 나중에 밝혀진 바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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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낙동강공방전(분초의 다툼)(2)
낙동강공방전초기의 피아전력을 비교해보면, 적은 병력과 장비가 한계에 이른데 반하여 아군은 상승일노에 있었다. 시간은 분명히 유엔군편이었다. 이때 누가 보아도 상식적으로 이 공방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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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영친왕의 그같은 거룩한 뜻도 결국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를 못하였으니 그것은 그분의 귀국이 너무나 늦어진 때문이었다. 5·16 군사혁명 직후 새로운 정권의 수뇌부 사이에는 이라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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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차관 이경호씨, 철도청장엔 이용씨
정부는 22일자로 교통부 차관에 전 국방부 차관 이경호씨를 기용 발령하고, 이룡 교통부 차관을 철도청장에 전임했다.. 모산 「버스」충돌사건 및 원주열차 충돌사고에 책임을 지고 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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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적치하의 3개월(1)
(상) 북괴가 남한일대를 강점하고 실시한 정책에는 두 가지 특색이 있었다. 그 하나는 점령지역의 인적·물적 동원을 서둘러 재빠르게 전력화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소위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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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국군의 전선정비(3)
충북음성의 무극리전투는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이 1개대대 미만의 병력으로 적1개연대를 완전히 섬멸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물론 한국전쟁전체를 통해 볼 때 무극리전투 이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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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안보 보좌관 유재흥씨 발령
정부는 7일자로 전주 이탈리아 대사 유재흥씨를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 발령했다. ▲49세·충남 공주출신 ▲일본 육사·미 참모대학 졸 ▲6사단장·2군단장 ▲육군참모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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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안보담당보좌관 유재흥 예비역중장
김성은씨의 후임으로 제2대 청와대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장관급)에 임명된 유재흥씨는 7일 아침 보좌관으로 첫 출근했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60년 7월 육군 중장으로 자진 예편하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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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전25시-민족의 증언(69)|미 제24사단의 혈투(2)
북괴남침에 앞장을 섰던 제105 「탱크」 사단의 전 정치장교를 전회에 이어 다시 등장시켜 미 제25사단과의 전투상황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오기완씨 (당시북괴군제105「탱크」 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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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대전의 25시(7)|미 제24사단의 혈투(1)|「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미 제24사단이 개전 초에 참담한 패배를 거듭했지만 북괴군도 7월 중순에 접어들면서부터 진격 속도가 처지기 시작했다. 특히 미 공군의 제공권 장악으로 남침의 앞장을 섰던 막강의 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