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휴전협정 19주년|조인에서 민통선북방 영농까지

    휴전 19년-. 53년7월27일 정전협정이 조인 된지 19년만에 맞는 휴전기념일은 남북화해 「무드」속에 묻혔다.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된 후 처음 맞이하는 휴전19들은 동서해빙에 발

    중앙일보

    1972.07.27 00:00

  • 국론 분열 책동 경계해야

    박정희 대통령은 20일 『남북 공동 성명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5천만 민족 앞에 무력과 폭력의 포기를 명백히 약속한 것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 성명만으로

    중앙일보

    1972.07.20 00:00

  • 7.4공동성명, 그 이후 대미, 대유엔 관계

    【워싱턴=김영희특파원】남북한의 합의는 『미국의 대한정책이 변경될 것인가』, 특히 『미국의 북한방위 공약은 축소될 것인가』 라는 의문을 던졌다. 닉슨행정부의「아시아」정책의 기조를 놓

    중앙일보

    1972.07.07 00:00

  • 육군 최고수뇌의 인사 이동

    정부는 30일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및 차장, 제1·제2 군사령관, 합참 본부장, 육사교장 등 육군 최고수뇌들의 대폭적인 인사 이동을 단행했다. 우선 그 명단을 보면 오는 8월6

    중앙일보

    1972.05.31 00:00

  • (299)휴전회담의 개막(13)

    7월27일의 5개 항목의 의제채택에 이어 28일의 제12차 회의부터 「군사분계선」 구획문제 토의에 들어갔는데 예상한대로 쌍방은 팽팽히 맞서 끊임없는 논쟁을 벌였다. 이때부터 한국휴

    중앙일보

    1972.03.08 00:00

  • 미-중공 공동성명 전문

    【상해27일 UPI동양】닉슨 미국대통령과 중공수상 주은래가 27일 발표한 공동 코뮤니케 전문은 다음과 같다. 『미합중국의 닉슨 대통령은 중화인민공화국 수상 주은래의 초청으로 197

    중앙일보

    1972.02.28 00:00

  • (294)휴전회담의 개막(8)|한국의 입장(3)

    휴전회담개최는 한국정부와 한국인 전체를 난처한 입장에 몰아 넣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국군수뇌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때까지 국군은 50년 7월14일의 작전 권 이양으로

    중앙일보

    1972.02.23 00:00

  • (288)|휴전 회담의 개막-전반부(2)|말리크 시의 배경(2)

    미 행정부 요인이 처음으로 38선 휴전에 동의를 비친 것은 「유엔」사무총장 「트리그브·리」가 한국 휴전을 종용한 바로 다음 날인 1951년6월2일이었다. 이날 한국 전쟁과는 여러모

    중앙일보

    1972.02.09 00:00

  • 외교진용 쇄신 정세 격변 대응-박대통령, 외무·교통부 등 순시 외교관 정신교육 강화

    체신부는 비적성 공산국가와의 통상 등 관계개선을 모색한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금년 안에 「유고」와는 전신·전화시설을, 「쿠바」 「폴란드」 및 「체코」와는 전신시설을 갖출 계획이다.

    중앙일보

    1972.01.18 00:00

  • 정치대화화 노력

    【동경=조동오특파원】김종필 국무총리는 『남북적십자회담이 한반도 통일을 위한 대화의 토대가 되고 현재의 인도적 대화가 정치적 대화로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총리는 3일

    중앙일보

    1972.01.04 00:00

  • (308)「청룡」돌아오다|파월6년…공산침략 막아「세계의 한국」과시

    주 월 한국군의 첫 철수부대인 해병 청룡부대 제1진 천여 명이 9일 부산에 개선했다. 65년10월 첫 전투부대로 파월 된 청룡부대는「캄란」만에 상륙한 후「투이호아」·「출라이」·「

    중앙일보

    1971.12.10 00:00

  • (307)정중여산-무겁고 조용하기 산과 같이 하라

    11월27일부터 12월4일에 이르는 8일동안 중서부전선에서는 창군이래 최대의 동계기동훈련 『승진 71호 작전』이 전개되었다. 이 『승진 71호 작전』은 제○군단장 이병형 육군중장

    중앙일보

    1971.12.04 00:00

  • 인군에 「파」진격령

    【뉴델리24일AP특전동화】인도수상 「인디라·간디」 여사는 24일 전 인도군에게 만일 자위상 필요하다면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하고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진격해도 좋다는 명령을

    중앙일보

    1971.11.25 00:00

  • (257)「맥아더」원수 해임(6)

    (1) 1951년 3월 중순에 「트루먼」대통령은 한국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중대결정을 내렸다. 물론 이것은 「맥아더」가 주장한 것 같은 「완승」이 아니라 「유엔」동맹국의 의향에 따른

    중앙일보

    1971.11.24 00:00

  • 한·일 안보 사또 수상 중의원 답변 요지

    11일 일본 중의원에서 있었던 한일 안보 문제에 대한 질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문=복전 외상은 11월4일 중의원 예산 위원회에서 1951년2월1일의 「유엔」에서 있었던 중공 침

    중앙일보

    1971.11.12 00:00

  • 제적 학생 구제용의 없나

    국회는 25일 김종필 국무총리, 유재흥 국방, 민관식 문교 장관 등을 출석시켜 위수령 발동 등 학원 사태에 대한 이틀째 질문을 계속했다. 질문에서 이정석(공화) 의원은 『이번 사태

    중앙일보

    1971.10.25 00:00

  • 인도-파키스탄관계의 악화

    카라치로부터의 보도에 의하면 지난 17일부터 인도와 동파키스탄접경지대에서는 소규모의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와 때를 같이하여 파키스탄군부대는 인도와 서파키스탄국경선에 대규모

    중앙일보

    1971.10.19 00:00

  • 국군의날

    오늘은 건국23년을 기념하는 국군의 날이다. 군·민다같이 국군의 창설과 성장을 경축하는 날로서 특히 군인의 입장에서는 국군의 이념과 사명을 되새기고 육·해·공·해병대등 전군 일체의

    중앙일보

    1971.10.01 00:00

  • (233)유엔군의 총퇴각(6)

    (1) 11월26일, 중공군의 제2차 공세가 전개되었을 때 「네드·아먼드」장군이 지휘하는 미제10군단은 한국동북부에 깊숙이 쳐들어가 있었다. 한국군 제1군단의 수도사단과 제3사단,

    중앙일보

    1971.09.27 00:00

  • 민족의 증언(232)|「6·25」21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유엔」군의 총퇴각(5)|금괴반출

    육해공군·경찰로 편성된 인양 수색대가 나와 함께 백령도에 가서 47일간을 머무르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워낙 인양 기술들도 시원치 않은데다가 침몰 위치가 휴전 조인 후 이북에 전해

    중앙일보

    1971.09.24 00:00

  • (228)노병의 낙조|유엔군의 총퇴각(1)

    1950년11월24일, 「유엔」군의 종전 공세 전개를 직접 보려고 동경에서 평양으로 날아온 「더글러스·맥아더」원수는 자신만만한 성명과 함께 「크리스머스」까지 병사들은 집으로 몰아갈

    중앙일보

    1971.09.16 00:00

  • 「전쟁과 평화」에 비견할 첫 역사 소설

    「솔제니친」의 신작 대하소설 『1914년 8월』(제1부)은 소련 안에서 햇볕을 보지 못하다가 지난여름 「파리」YMCA 출판부에 의해 처음 「러시아」어판으로 출간됐다. 작가 자신도

    중앙일보

    1971.09.15 00:00

  • (224)|거제도 폭동(2)|남과 북의 포로 수용소(16)

    미군이 공산포로를 다루는데 있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일반포로」와 「투항귀순자」를 구별하지 않고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과 같은 이념 전에서는 이 두 가지 개념은 엄격히

    중앙일보

    1971.09.06 00:00

  • (216>남과 북의 포로수용소(8)|박백 중위의 경우(1)

    휴전협정에 따라 교환된 쌍방포로숫자를 보면 국군이 7천8백62명(유엔군 4천7백64명)인데 비해 괴뢰군은 6만4백49명(중공군 5천6백40명)이었고, 이보다 앞서 교환된 쌍방의 부

    중앙일보

    1971.08.18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