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나침반] 시민이 방송을 바꿀 차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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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프로그램마다 앞이나 뒤에 책임 프로듀서 이름이 나온다. 시청자가 묻는다. 저 사람은 무엇을 책임진다는 것인가. 재미를 책임지겠다는 것인가, 공익성 혹은 예술성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시청률을 책임지겠다는 것인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PD와 대통령은 목표와 책임이 비슷하다. 시청자(국민)에게 행복을 안겨주기 위해 전문가의 지혜와 역량을 모아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느 면에서 대통령은 5년 동안 대한민국이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하고 편집해야 하는 책임 PD다.

TV가 감수해야 하는 모욕적 별명 세 가지는 전통적으로 바보, 문제아, 그리고 노예다. 바보상자 속에 안주하니까 바보 소리를 듣는다. 선정과 폭력으로 문제를 일으키니까 문제아다. 시청률의 노예상태에서 못 벗어나니까 노예다. 새해엔 같은 소리를 듣더라도 제발 모욕감만은 피해 갈 방도를 찾자.

그러기 위해선 먼저 이기적인 바보가 아니라 이타적인 바보가 돼야 한다. 비록 단기적으로는 손해 보더라도 믿는 바대로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일관성 있는 바보면 부끄럽지 않다.

문제아 역시 두 종류다. 문제를 일으키기만 하고 수습은 하지 못하는 문제아도 있지만 문제를 제기해 뭔가를 바꿔보려는 문제아도 있다.

세상이 병들어 가는 데 앞장서는 문제아가 아니라 세상을 치유하자고 고함지르는 문제아가 되어야 한다. 노예도 두 종류다. 노예근성으로 똘똘 뭉쳐 호시탐탐 제 먹이만 찾는 노예와 늘 탈출을 꿈꾸며 반항하는 노예는 그 끝이 다르다.

이번 대통령당선자는 좋은 나라를 만드는 일에 유달리 시민의 참여와 역할을 강조했다.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심이며 시민의 수준만큼 정치 수준도 끌어올리는 게 목표라는 말도 했다. 문득 대중과 시민의 차이가 궁금해진다.

공연장에 가면 대중이고 강연장에 가면 시민인가. 팬클럽을 만들면 대중이고 시민단체에 가입하면 시민인가. 살빼기 운동을 하면 대중이고 건강한 사회 만들기 운동에 참여하면 시민인가.

대중과 시민 사이에 넘지 못할 금은 없다고 본다. 재미와 이익만을 따라가던 대중도 의미와 이념을 중시하는 대열에 합류하도록 하는 게 진정한 시민운동이다.

이제 시민이 방송을 바꿀 차례다. 대중만 바라보는 방송은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시민을 바라보는 방송은 건강한 사회를 지향한다. 책임 프로듀서들은 시민과 연대해 그들의 수준만큼 방송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할 것이다. PD가 바뀌면 방송이 바뀐다. 방송이 바뀌면 나라도 바뀐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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