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법봉 들고 바닷가 간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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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판사들이 현장 검증을 위해 바다로 나간다. 검증을 마친 뒤엔 현지 법정에서 바로 재판을 열고 증인을 신문한다. 법원이 이런 방식의 ‘찾아가는 법정’을 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고법 민사8부(부장 홍기태)는 전남 고흥군 어민들로 구성된 10개 어촌계가 “고흥만 방조제 개발사업 때문에 어획량이 줄었다”며 국가·고흥군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심리하기 위해 이달 26일 현장 검증에 나선다고 11일 밝혔다. 재판부는 현장을 둘러본 뒤 인근 법원에서 재판을 진행한다.

 고흥군 도덕면 용동리~풍류리를 잇는 2.8㎞ 길이의 고흥만 방조제는 3900억여원의 정부지원금을 받아 1995년 완공됐다. 어촌계 측은 “방조제 4개 갑문에서 오염된 담수를 쏟아내 조개·해조류 생산량이 20% 줄었다. 개발사업 비용을 댄 정부와 방조제를 설치·관리한 고흥군에 책임이 있다”며 2007년 11월 100억원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지난 7월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자연재해 등의 영향을 감안해 배상 범위를 70%(약 72억원)로 제한했다. 어민들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효율적인 재판을 위해 ‘찾아가는 법정’을 제안했다. 방조제 건설 전후 어업 상황의 변화를 제출된 자료로만 감정하는 게 쉽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26일 오전 3시간 동안 어민들과 함께 배를 타고 고흥만 방조제 인근을 살펴보기로 했다. 오후엔 현장에서 가까운 광주지법 순천지원 고흥군법원에서 재판을 열고 소송 당사자들의 주장을 두 시간여 동안 듣는다. 법원 관계자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생업으로 바빠 법정을 찾기 어려운 어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련했다”며 “소송 당사자와 현장에서 직접 소통함으로써 재판 절차에 대한 이해도와 신뢰를 높이기 위한 시도”라고 설명했다.

 우리의 고등법원에 해당하는 미국 연방항소법원은 10여 년 전부터 관할구역 내 로스쿨·시청 등에서 찾아가는 재판(Court On the Road)을 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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