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다는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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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호 04면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쌀쌀해졌습니다. 왠지 따뜻해 보여 샛노란 표지의 책을 펼쳤습니다. MBC에서 휴먼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유해진 PD가 제작 뒷얘기를 쓴 『살아줘서 고마워요』였습니다. 대장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남편 준호씨를 위해 직장일과 집안일과 병구완을 동시에 하던 아내 은희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editor’s letter

“제가 아빠를 지금처럼 이렇게 희생하는 마음으로 사랑했더라면 지난 십 년 동안 결혼생활이 참 행복했을 거란 생각을 했어요. 왜 진작 이런 마음으로 남편을 대하지 못했을까. 지금은 제 모든 것을 다해 아빠를 사랑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 생활은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참 행복하다는 생각도 해요.”

왜 우리는 그것을 ‘잃었을 때’라야 비로소 ‘가졌을 때’의 소중함을 깨닫는 걸까요. 그저 ‘살아 있어 주기만 해도’ 이렇게 고마운 것을.

일본 소설가 이쓰키 히로유키는 신간 『대하의 한방울』에서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들려줍니다. 사방 30㎝, 깊이 56㎝의 나무 상자에 한 그루의 호밀을 심습니다. 넉 달 동안 키운 뒤 흙을 모두 털어내고 잔뿌리까지 모두 쟀습니다. 이 작은 상자 속에 들어 있던 뿌리의 총길이는 무려 1만1200km. 시베리아 철도의 1.5배나 된다고 합니다. 가녀린 식물이 이럴진대 사람인 내 생명은 얼마나 힘을 내서 지금 나 자신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요. 또 당신은요.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문득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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