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드라마·영화에 당당한 '여풍' 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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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올루션' (EVEEolution) .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이 용어는 이브(EVE) 와 혁명(Revolution) 의 합성어. 마케팅 컨설턴트인 페이스 팝콘이 여성의 활동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현대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여성이 미래를 대표한다. 여성은 세상을 움직일 만큼 '진화' 했다. 그들이 세상의 절반이어서가 아니라 사회.문화의 초점이 남성 중심에서 여성적 감수성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게 팝콘의 설명이다. 이브올루션은 한국에도 그대로 통한다.

얼마전 MBC 드라마 '아줌마' 에서 장진구(강석우) 와 오삼숙(원미경) 이 이혼을 앞두고 재산분배 문제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결과는 장진구의 참패. 우직한 여자 오삼숙을 보며 이 시대 아줌마들은 십년 묵은 체증을 한꺼번에 쓸어내렸고 아저씨들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아줌마' 가 현재 우리 대중문화에 불어닥친 '여자 시대' , 즉 이브올루션의 전주곡이었을까.

때마침 '아줌마' 이후 TV에서는 '여인천하' 와 '명성황후' 를 비롯 '네 자매 이야기' '소문난 여자' '그 여자네 집' 등 여자가 전면에 나선 드라마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영화에서도 '피도 눈물도 없이' '패밀리' '조폭마누라' 등 강인한 여자를 다룬 작품들이 속속 제작되고 있다.

*** 순진하면 뭘해, 당당해야지

TV는 말 그대로 여인 천하다. 격변기에 태어난 한 여성의 굴곡진 삶을 조명하는 '소문난 여자' (SBS.주인공 강성연) , 네 자매의 인생과 사랑을 풀어내고 있는 '네 자매 이야기' (MBC.주인공 황수정 외) .

여기에 '여인천하' (SBS) 와 '명성황후' (KBS) 까지 더해지면 '왕건' 을 빼고는 드라마 모두가 여자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 여주인공의 특색은 당당하다는 점이다. 남자에게 얽매이거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사랑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강하게 주장한다.

심지어 남성 위주의 사극 '태조 왕건' (KBS) 에서도 왕건의 둘째 부인 도영(염정아) 이 말을 타고 전투에 나서는 장면이 나올 정도다. 역사서에는 그런 사실이 언급돼 있지 않았지만 제작진은 궁궐 속에서 암투나 벌이던 기존 캐릭터와 달리 현대적 감각의 맹렬 여성을 등장시킨 것이다.

'여인천하' 나 '명성황후' 에서 보여주는 강수연.이미연의 이미지는 과거 사극의 여주인공이 남자를 애교나 성적 매력으로 후려 권력을 쟁취하던 '뻔한 얘기' 에서 벗어나 강단있고 굳센 면을 강조, 오히려 남성 캐릭터를 능가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여성들의 지위 향상으로 달라진 사회상의 반영이다.

앞으로 KBS는 '인생은 아름다워' 의 후속으로 세 명의 여성 웨딩플래너의 일과 사랑을 다룬 '쿨' 을, SBS는 '여인천하' 후편으로 30대 여성들의 자아찾기를 그린 '여고 동창생' 을 각각 방영할 예정이어서 당분간 여성 드라마의 바람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 영화 속 여자, 폭력도 OK

투견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액션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 에서 전도연과 이혜영은 조직 보스와 택시 운전사 역을 맡아 세상에 절대로 굴하지 않는 힘 있는 여성상을 선보인다.

한국 영화에서 드물었던 여성 느와르다. 이번주 촬영에 들어갈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류승완 감독은 "남성 이야기에서 벗어나 두 여성이 액션을 펼친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 올 것이다. 연약한 여자에서 점차 강해져가는 여성의 모습은 상당한 매력을 지닐 것" 이라고 말한다.

'조폭 마누라' (9월 개봉 예정) 에서 신은경은 폭력 세계에서 몸 하나를 무기로 사는 '여전사' 역을 맡았고 곧 촬영에 들어갈 '패밀리' 에서 황신혜는 목포 출신 깡패들과 맞대결을 벌이는 룸살롱 사장이 됐다. 또 풋풋한 스무살 여자들의 성장기를 그린, 배두나와 이요원 주연의 '고양이를 부탁해' (8월말 개봉 예정) 에는 비중있는 남자가 없다.

한국 영화에서 여배우는 늘 남자 주인공을 받쳐주는 역할이 컸고 여자 단독 주인공이라 해도 애로물이나 멜로물이 다수였다.

그 여자들이 이제는 아주 강력한 전사 혹은 폭력배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강한 여인들로 바뀌어가고 있다.

남자 영화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개발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있는 영화계가 여성 캐릭터에서 돌파구를 찾을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여성 중심 이야기는 앞으도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 예견된 바람이 불어온 것일 뿐

남성 위주의 전통적인 전략으로는 더 이상 소비시장에 먹히지 않는다는 게 제조업분야에서는 이미 정설로 자리 잡았다. 이제 그런 현상이 대중 문화로 파급되고 있는 것이다.

이화여대 함인희 교수는 "연애담이나 남자 이야기는 써 먹을 것 다 썼다는 생각이 지배적어서 새로운 소재를 찾다보니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됐고 이것이 소비의 주체로 떠오른 여성의 구미에도 맞고 있다" 고 분석한다.

여기에 강한 여자들의 출현도 변화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취향에 맞아 떨어지고 남성들에게는 흥미를 유발시킨다, 실제로 이런 여성들이 주연이 된 소재들은 '새 것' 이란 점에서 연출자나 작가.감독에게도 매력적이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사극이라도 여성은 옛날 여성 그대로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 이는 시청자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신인류' 와 같은 당당하고 능력있는 '슈퍼우먼' 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도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 는 의견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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