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민주노총의 점입가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김한별 사회1부 기자

“대의원대회도 못 열면서 뭘 하겠다고….”

 26일 서울 강서구 화곡동 KBS88체육관. 민주노총 제54차 임시대의원대회가 정족수 미달로 무산되자 한 조합원은 이렇게 말했다. 대의원대회는 민주노총의 최고 의결기구다. 중앙집행위원회가 ‘지도부 모임’이라면, 대의원대회는 민주노총의 ‘민의(民意)’를 대표하는 기구다.

 하지만 이날 모인 대의원은 정원 842명 가운데 393명뿐이었다. 성원 정족수인 과반에 못 미쳤다. 김영훈 위원장은 “빠른 시일 안에 후속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대의원들을 달랬지만 반응은 냉랭했다.

 올해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한 번도 제대로 열리지 못했다. 4·11 총선을 앞뒀던 1월 정기대의원대회, 3월 임시대의원대회 역시 정족수 미달로 무산됐다. 민주노총이 위기를 맞고 있는 이유는 뭘까. “난마(亂麻)처럼 얽혀 있는 정파 갈등 때문”이라는 게 노동계의 중론이다. 앞선 두 대회의 이슈는 통합진보당 문제였다. 통진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주도한 국민파(NL계열)와 이에 반대하는 현장파(PD계열)가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26일 대회의 쟁점은 연말로 예정된 차기 위원장 직선제 선거를 유예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정파 갈등이 깔려 있었다. 민주노총이 임원 직선제를 도입한 것은 2007년이었다. 간선제 선거에서 국민파의 조직력에 밀렸던 현장파가 주도했다. 하지만 3년 뒤 국민파 지도부는 준비 부족을 이유로 실시를 미뤘다. 이번에는 현 지도부가 같은 이유로 유예하려 하자 현장파가 들고일어나 “집행부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현장파와 상극인 국민파 일부가 이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경기동부연합 쪽에서 이번 기회에 현 지도부를 몰아내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2010년 선거에서 국민파 지지로 당선됐지만 통진당 사태 때 옛 당권파(경기동부연합)와 거리를 뒀다. 이 때문에 노총 내 옛 당권파 연계 조직의 미움을 샀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여의도’ 뺨치는 정치적 행태다. 민주노총이 조합원을 위해 일하는 노동운동 조직인지, 통진당과 같은 정치조직인지 헷갈릴 정도다.

 민주노총은 조합원 66만 명의 거대 조직임을 자처한다. 하지만 이번에 직선제를 위해 취합된 선거인 명부는 40여만 명 수준이었다. 조합원들이 신분노출을 꺼려 명부 제출을 거부했고, 그것이 직선제 유예 명분이 되긴 했지만 조합원이 줄고 있는 것은 현실이다.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하고 지도부는 권력다툼에만 몰입한다면 조합원들이 계속 이탈할 수 있다. 민주노총이 근로자를 위한 조합으로 거듭나려면 노동운동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