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속차에 치인 187㎝·20대 '골든타임'놓쳐 결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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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한국장기기증원 홈페이지의 ‘뇌사 기증자 추모관’에는 이런 글이 게시돼 있다. ‘언젠가는 나의 주치의가 뇌기능이 정지했다고 단정할 때가 올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의 나의 목적과 의욕이 정지되었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그때 나의 침상을 죽은 자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산 자의 것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나의 눈은 해 질 때의 노을을,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얼굴과 여인의 눈동자 안에 감추어진 사랑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에게 주십시오. 나의 심장은 끝없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에게 주십시오…’.

 그러나 김원중(1986~2012·사진)씨는 너무 젊었고, 그래서 너무 안타깝다. 건국대 일어교육과 4학년이던 김씨는 지난 여름방학 때 경기도 연천군이 초청한 일본인들의 통역 일을 맡았다. 비가 내리던 8월 18일 밤 11시40분, 전곡읍의 숙소 인근 마트에서 물건을 산 뒤 길을 건너다 쏜살같이 내닫던 과속 승용차에 치였다. 연천의료원, 이어 의정부성모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중환자실이 없다거나 수술할 의사가 없다며 난색이었다. 밤거리를 헤매다 19일 오전 4시에야 서울 면목동의 한 병원에 도착해 간신히 수술을 받았다. 골든 타임(환자의 생사를 결정짓는 최소 시간)을 놓친 것이다.

 뇌를 크게 다쳤지만 수술 결과는 좋지 않았다. 모교인 건국대병원으로 옮겨진 김씨는 뇌사 판정을 받았다. 8월 21일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의 부모는 심사숙고 끝에 아들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심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장차 선생님이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던 아들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22일 심장·간·신장(2개)·소장을 적출하는 수술이 이루어졌다. 1m87㎝, 70㎏. 그의 부친 김용철(57)씨는 “내가 봐도 참 잘생긴 아들”이라고 말한다. 이 훤칠한 청년이 나누어준 장기 덕분에 추석을 앞두고 5명이 새 생명을 얻었다. 유해는 벽제 추모공원 납골당에 모셔졌다. 아버지 김씨는 “내 아들은 갔어도 심장은 지금도 뛰고 있습니다. 아들은 살아 있어요”라고 했다.

 뇌사 기증자 추모관의 글은 이렇게 끝난다. ‘…우연한 기회에 나를 기억하고 싶다면, 당신들이 필요할 때 나의 친절한 행동과 말만을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부탁한 이 모든 것들을 지켜준다면 나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나도 김원중씨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들을 먼저 보낸 부모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장기 기증을 결정할 때 김씨의 모친은 남편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적출 수술 때도, 장례식에서도 시종일관 침착했다. “나보다 더 차분하던 사람이…. 요즘 밤에 자다가 집사람이 옆에 없어 일어나 보면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곤 해요”라고 김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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