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기 반란’ 실패 … 시장은 실망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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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기 반란’이 사실상 수포로 돌아갔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스페인·이탈리아 국채매입 프로그램을 재가동하는 데 실패했다. 국채매입 프로그램은 드라기가 지난달 26일 영국 런던에서 시작한 반란의 핵심 내용이다. 그날 그는 “유로화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나를 믿으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드라기는 2일 열린 ECB 금융통화정책회의에서 자신의 뜻을 정책화하지 못했다. 그는 정책회의 직후 기자회견에서 “공개시장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만 말했다. 위기국 채권매입에 대해선 “회원국들의 재정 개혁과 통합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원론적인 발언을 되풀이하는 데 그쳤다. ECB 최대 주주인 독일 분데스방크의 얀스 바이트만 총재가 강력 반발한 결과로 풀이된다. 결과적으로 드라기는 ‘양치기 소년’이 됐다. 그의 리더십 한계가 드러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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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라기의 조치에 대한 시장의 기대는 켰다. 추락하던 주요국의 주가가 가파르게 치솟았고,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위기국의 채권금리는 내림세로 돌아섰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이를 ‘드라기 서프라이즈’라고 치켜세웠다.

 문제는 그가 바이트만과 사전 의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드라기는 일단 말부터 해놓고 바이트만을 압박해 들어갔다. 처음엔 성공하는 듯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실망시켰다간 후환을 걱정해야 하는 판이었다.

 드라기는 당초 두 가지 해법을 시사했다. 첫째는 올 3월까지 진행됐던 국채매입 프로그램을 재가동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9월에 출범할 상설 구제금융펀드인 유럽재정안정화기구(ESM)에 자금을 지원해 채권을 사들이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바이트만의 반격은 강력했다. 그는 이미 두 차례 드라기의 기습에 당했었다. 처음은 지난해 이탈리아 국채투매 사태 와중이었다. 그때 드라기가 전격적으로 이탈리아 국채 매입 방안을 내놓았다. 바이트만이 반대했지만 ‘상황이 급박하다’는 논리에 밀렸다. 다음은 지난달 초 전격적인 기준금리 인하였다.

 드라기 전술을 간파한 바이트만은 분데스방크 실무진을 통해 “법적인 테두리를 벗어난 ECB의 조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미리 흘렸다. 시장을 미리 실망시켜 충격을 완화해보려는 전술이었다. 그리곤 금융통화정책위원회에서 ‘법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로 드라기 반란을 제압한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시장은 원투펀치를 맞은 꼴이 됐다. 앞서 2일 새벽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도 3차 양적 완화 등 추가 부양 조치를 내놓지 않았다. 버냉키는 미 경제 상황을 어둡게 봤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미 경제전문채널 CNBC는 “미국·유럽의 중앙은행 총재들이 자신들 앞에 깔린 레드 카펫을 외면했다”고 평했다.

 다시 시장에선 스페인 국채 투매사태가 재연일 조짐이다. 주가도 급락세로 돌아섰다. 문제는 긴급 대응할 뾰족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임시 구제금융펀드인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의 돈을 동원해 매물로 쏟아지는 스페인 국채를 거둬들이는 것은 역부족이다. 동원 가능한 자금은 1000억 유로(약 140조원)에 지나지 않는다. 9월 5000억 유로 규모의 ESM이 출범하기까지 스페인이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 국제 금융시장은 걱정이 태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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