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알리의 그림자로 한평생, 나는 행복한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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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하만 알리가 런던의 갤러리에서 형 무하마드 알리와 소니 리스튼의 명승부(1965년)를 담은 사진을 보며 형의 매니저로 산 47년을 얘기하고 있다. [사진 크리스티나 얀센]

라하만 알리(69). 전설적인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의 한 살 아래 친동생이다. 이름은 귀에 설지만 그 역시 한때 잘나가던 권투선수였다. 형과 같은 헤비급으로 열네 번 경기를 치러 10승3무1패를 기록했다. 10번의 승리 중 7번이 KO승이었다. 그러다 1965년 5월 25일, 권투 역사의 명승부로 기록되는 형과 소니 리스튼의 경기를 보면서 결심한다. ‘권투선수 라하만’이 아닌 ‘무하마드 알리의 매니저’로 살겠다고.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무슬림인 ‘무하마드 알리’로 다시 태어난 형을 보며 자신도 ‘루디 클레이’에서 ‘라하만 알리’로 개명했다.

 47년 동안 주인공인 형에게 모든 걸 양보하며 살아왔지만 지난 19일 런던의 포먼 스모크하우스 갤러리에서 만큼은 그가 주인공이었다. 런던 올림픽을 맞아 열리는 ‘알리와 함께 링 위에서(In the Rings with Ali)’ 특별전 개막식에서다.

이날은 그의 생일이기도 했다. 평생 알리를 가까이에서 촬영해 온 사진작가 17명의 작품 70점이 전시됐다. 알리 가족의 집이자 훈련장인 미국 켄터키주 루이스빌에서 안개 낀 새벽에 훈련하는 알리의 뒷모습, 링 위에서 상대를 쓰러뜨리고 포효하는 모습 등이 생생히 살아 있다. 2년 넘게 전시를 준비한 샌드라 히긴스는 “형에게 가려진 동생의 스토리가 애틋해서 일부러 라하만을 전시 오프닝에 주빈으로 초대했다”고 밝혔다.

 전시 개막식 후 숙소에서 본지와 단독으로 만난 라하만은 인터뷰 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는 평생을 형의 그림자로 살아왔다. 형에게 질투가 나지 않았냐고 많이들 물어본다. 하지만 난, 형의 그림자였다는 사실이 너무도 자랑스럽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형이 이기건 지건,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기뻐하고 슬퍼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권투선수 곁에서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 그것 만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도 했다. 형 무하마드는 파킨슨병으로 거동이 불편하고 말도 거의 못 한다. 라하만 역시 선수시절 부상으로 인해 경미한 파킨슨병을 앓고 있지만 건강한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형을 그렇게도 따랐다는 라하만이다. 권투도 형 따라 시작했다. “형이 아끼던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같이 울면서 경찰에 신고하러 갔더니 경찰관이 ‘권투를 배우면 도둑이 무서워서 꼼짝 못 할 거야’라고 하더라. 형은 그래서 권투를 시작했고, 나도 따라서 했다. 형은 물 만난 고기 같았다.”

 권투를 접은 후 라하만은 붓을 들었다. 간판 포스터를 그리기도 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전시장 한켠엔 어머니의 볼에 입맞추는 형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라하만이 특히 좋아하는 그림이다. 그는 “붓을 들 때 만큼은 자유를 느낀다”고 했다.

 권투에 대한 애정도 끊지 않았다. 권투를 통해 장애아에게 희망을 주는 ‘아웃리치 프로그램’ 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당신에게 권투란 무엇을 뜻하냐”는 질문에 계속 웃기만 하던 그가 이내 숙연해졌다. “권투는 인생이다. 온전히 나 자신만으로 승부를 내는 진정한 스포츠다. 물론 질 때도 있다. 하지만 패배가 두렵다고 승리의 가능성까지 놓치는 건 비겁하다. 패배도 인생이다. 아무 것도 없는 인생보다,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발버둥쳐본 인생이 의미가 있지 않겠나.”

런던=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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