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치히터] 그라운드의 신사들

중앙일보

입력

아메리칸리그에서 무려 7차례나 타격왕의 자리에 올랐던 로드 커루는 '그라운드의 신사'로 불리웠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명문 뉴욕 양키스와의 대전.

양키스의 상대 투수는 커브볼의 명수 캣피치 헌터. 주심은 베스트셀러 '돌아온 심판(The Umpire strikes back)'의 저자로 잘 알려진 명심판 론 루치아노였다.

11년째 메이저리그 심판을 맡아본 루치아노 주심은 이 상황에서는 낙차 큰 바깥쪽 커브로 정면승부를 걸어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헌터가 와인드업한 뒤 공을 힘차게 뿌렸다. 공은 루치아노주심이 예상했던대로 타자의 몸 쪽으로 들어오다가 몸 바깥쪽으로 흘렀다.

순간 주심의 손이 번쩍 들렸다.

'스트라이크 쓰리!'

그러나 그 순간, 당연히 캐처미트로 빨려 들어갔어야 할 공이 봉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커브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은 것.

주심 루치아노는 난처했다. 이미 선언한 판정을 뒤집을 수도 없고. 그러나 이 판정의 당사자인 타자 커루는 주심을 한번 돌아보는 일도 없이 뚜벅뚜벅 덕아우트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경기가 끝난 뒤 루치아노주심은 타자였던 커루를 찾아가 사과했다.

"미안했어. 아까의 제3스트라이크는 오판이었어"

여기서 커루는 '그라운드의 신사'다운 질문을 했다.

"그런데 그전의 두 개는 정말 스트라이크였어요?"

"물론이지. 그것들은 틀림없는 스트라이크였었어."

"그럼 됐어요. 저는 2개나 틀렸는데, 당신은 하나밖에 틀리지 않았으니 제가 오히려 한 개 빚진 셈이네요"

요즘 우리나라 같으면 자신의 오판을 선수에게 사과하는 심판이나, 이를 농담으로 받아넘기는 여유있는 타자를 모두 찾아볼 수 없다.

그 뒤 루치아노 심판은 심판직을 사직하고 NBC-TV의 야구해설자로 활약하다가 자전적인 회고록 '돌아온 심판'을 써 메이저리그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고 물러났다.

우리 눈으로 볼때는 커루나 루치아노나 똑같은 '야구장의 신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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