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토론의 성패, 사람에 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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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말이 차고 넘친다. 깃털처럼 가벼운 말들이 온/오프를 넘나들며 둥둥 떠다닌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이 일순에 탕감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말이 사람을 죽이거나 도리어 죽임을 당하게도 한다.

"볏섬이나 나는 점포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현진건의 소설 『고향』에 나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말하기를 겁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일단 말을 시작하면 요령이 없다. 요령이 없을 뿐 아니라 아량도 없다. 말을 막 하는 게 말을 잘 하는 걸로 오해되어서는 곤란하다.

토론이야말로 텔레비전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교양프로그램이다. 국민적 관심사를 이런 관점에서도 보고 저런 처지에서도 건드려 보는 게 TV토론이다.

말들의 논리적 충돌을 통해 세상이 굴러가는 방향의 시시비비를 일깨우게 된다. 의제 설정의 기준은 당연히 시의성이다.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 두루 관심을 가질 만하고, 거기에다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반 정도씩 있는 의제가 적당하다. 물론 토론의 평점은 그날의 논제를 누가 어떤 말로 시청자를 잘 설득하느냐에 좌우된다.

현재 방송 중인 TV토론프로그램은 모두 네개다. '심야토론' (KBS1), '쟁점토론' (KBS2), '백분토론' (MBC), '난상토론' (EBS). 제목만으로는 성격을 가늠하기 수월하지 않다. 2월 둘째 주의 주제를 순서대로 살펴보자. 사이버 문화 이대로 좋은가, 흡연권 대 혐연권, 국가보안법 존속돼야 하나,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미디어의 역할 등이다.

문제제기는 된 것 같은데 과연 시청자에게 정보 전달이나 대안 제시가 만족할 만큼 되었는지는 상당히 의문이다.

성패는 역시 사람에 달렸다. 우선 진행자의 자질이 중요하다. 교육방송에서 '난상토론' 을 진행하는 왕상한 교수에게 토론의 진행자가 어떠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명쾌했다. 공정하고 중립적이어야 하며 패널들이 편안하게 말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패널이다. 시청자를 화나게 혹은 맥빠지게 만드는 패널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뭘 모르는 것까진 참아줄 수 있는데 끝끝내 우기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논리는 얕고 소리는 높다.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만 말하려면 토론프로그램 섭외에는 정중히 사양하는 게 예의다. 저돌성이 시청률을 올려줄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불꽃이 튀어야만 살아 있는 토론이라는 생각에 싸움꾼 성향의 인물을 꼭 하나 정도 집어넣는 걸 노하우라고 여긴다면 제작진도 깊이 반성해야 한다. 어설픈 말장난이나 우격다짐은 코미디 프로에서 보는 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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