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147조원 구제금융 신청 … 유럽재정위기 2라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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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살리고 국민은 쫓아내나” 9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엘 솔 광장에서 시위하던 시민이 이런 구호가 적힌 종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높은 실업률에 분노한 시민이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날 스페인은 은행 지원을 위해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마드리드 로이터=뉴시스]

유럽 재정위기가 마침내 스페인까지 삼켰다. 루이스 데 귄도스 재무장관은 10일 새벽(한국시간) 수도 마드리드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시중은행들의 부실을 해결하기 위해 유럽연합(EU)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스페인이 구제금융을 신청한 것이다. 2009년 11년 그리스에서 유럽 위기가 시작된 지 2년여만이다. 스페인은 유로존(유로화 사용권) 4위 경제대국이다.

스페인의 구제금융 신청으로 유럽 재정 위기는 2라운드를 맞게 됐다.2라운드는 1라운드보다 길고, 험한 길이 될 가능성이 크다.그리스등 유로존 주변국에서 스페인 등 중심국으로 위기가 본격화한데다 구제금융을 지원받는 나라에 강력한 긴축 요구를 하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스페인 구제금융은 정부 대신 스페인 부실 은행에 직접 돈을 넣는 형태다. 지금까지 EU가 지켜온 원칙과 어긋난다. EU 전체의 파국을 막기 위해 비상수단을 쓰는 셈이다. 스페인의 파국은 EU 공멸을 부를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이 깔려 있다.

로리 나이트 전 스위스중앙은행 부총재는 최근 본지와 인터뷰에서 “스페인은 그리스나 포르투갈과 차원이 다르다”며 “이 나라에 위기가 전염되면 EU의 능력이 본격적으로 검증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페인 국가부채는 9000억 유로(약 1320조원)에 이른다. 그리스보다 3배쯤 많다. 숨겨진 부채도 있다. 특히 올 여름 스페인은 뭉칫돈을 갚아야 한다. 6월94억2400만 유로, 7월 341만5600억 유로, 8월 98억1400만 유로 정도씩이다.

그러나 스페인 국채를 사는 해외 투자자들은 거의 없다. 여기에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은행 부실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EU가 스페인 시중은행에 돈을 넣어주지 않으면 스페인은 국가 부도를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를 위해 EU는 구제금융 협약까지 위반했다. 유럽재정안정기금(EFSF) 등은 시중은행 등 회원국 민간 부문이 아닌 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조성됐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나중에 협약을 고치기로 했다”고 말했다. 선 조치 후 근거 마련이다.

또 EU는 스페인의 반대에 굴복해 재정긴축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구제 대상이 스페인 정부가 아니라 시중은행이란 이유에서다. 재정긴축 없이 구제금융을 받는 선례가 만들어 진 셈이다. 사실상 앙겔라 메르켈(58) 독일 총리가 주도한 구제금융-긴축처방 전략(베를린 컨센서스)의 폐기다. 프랑수아 올랑드(58) 프랑스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된 셈이다.

이제 유럽위기는 진정되는 것일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EU가 스페인에 지원할 금액이 예상보다 많아 시장이 긍정적으로 평가할 듯하다”고 내다봤다. 최근 요동하던 시장이 어느 정도 안정될 수 있다는 얘기다.

스페인이 은행 구제금융을 받았다고 해서 재정위기의 근본원인이 제거된 것은 아니다. 로이터 통신은 “이날 구제금융 신청으로 스페인 은행 부실이 국가부도 사태로 번지는 것만은 일단 차단됐다”며 “남은 일은 가장 어려운 재정 개혁”이라고 지적했다.

경기침체 와중에 재정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게다가 오랜 지역갈등 때문에 스페인 중앙정부는 지방정부 재정개혁을 밀어붙이지 못하고 있다. 스페인이 그리스처럼 밑 빠진 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많다.

결국 EU는 또 다시 편법에 의존할 가능성이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을 동원하는 방식이다. 기존 구제금융 펀드는 회원국들의 출연금으로 조성됐다. 판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이 반발해 증액이 쉽지 않다. 상황이 다급해지면 ECB가 유로를 찍어 구제금융을 증액할 가능성이 있다.

ECB의 구제금융 참여는 지난해에도 논의됐다. 하지만 ECB 내부자들과 독일이 반발해 실현되지 않았다. 원조 닥터둠’인 마크 파버 투자자문사 마크파버리미티드 회장이 최근 본지와 인터뷰에서 “끝내 ECB가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그 결과는 대량자산파괴(Massive Wealth Destruction)”이라고 말했다. 중앙은행 돈 풀기가 낳은 인플레이션 때문에 실질 자산가치의 추락이 예상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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