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카디널스 역사 (1) - 리키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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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LA 다저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함께 내셔널리그의 3대 명문으로 꼽히는 팀이다.

특히 카디널스는 내용면에서 다저스와 자이언츠를 압도한다. 월드시리즈 9회 우승의 기록은 내셔널리그 최다이며(다저스 6회, 자이언츠 5회), MVP 수상자도 뉴욕 양키스에 이어 두번째로(17회) 많이 배출했다. (다저스 12회, 자이언츠 9회)

게다가 자이언츠와 다저스가 중간에 프랜차이즈를 옮겼던 반면 카디널스는 120년째 '야구의 도시' 세인트루이스를 충직하게 지키고 있다.

출범 당시 '브라운스(Browns)'였던 이름은 1899년 '퍼펙코스(Perfectcos)'를 거쳐 1901년 '카디널스(Cardinals)'로 고정됐다. 1902년부터는 밀워키에서 건너온 브루어스가 브라운스라는 이름을 재활용했지만, 이 브라운스는 1954년 볼티모어로 이전, 현재의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됐다.

카디널스의 출발은 흥미로웠다. 1881년 당시 세인트루이스의 유력자였던 크리스 반 더 아에는 자신의 사교클럽을 위한 볼거리 제공 차원에서 야구팀을 시작했다. 하지만 반 더 아에는 금새 야구의 매력에 푹 빠졌고, 브라운스를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최고의 팀으로 만들었다.

1891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이 해체되자 카디널스도 내셔널리그로 무대를 옮겼지만, 내셔널리그에서의 카디널스는 '동네북'이었다. 1913년까지 13년중 무려 7시즌을 팀순위의 가장 아래, 또는 아래서 두번째에 위치했던 것.

1916년 새로운 구단주 제임스 C. 존스는 카디널스 역사상 최고의 결정을 단행한다. 동향의 브라운스로부터 브렌치 리키를 스카우트해온 것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인물로 꼽히는 리키는 제1차대전의 병역에서 돌아온후 본격적인 실력발휘를 시작했다. 특히 1920년 구단의 부회장겸 단장에 취임하며 날개를 단 리키는 최초로 제대로된 팜시스템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에 찾아올 카디널스의 전성기는 이때까지 32개팀, 6백여명의 마이너리거를 독점할 수 있게 한 리키의 공헌이 결정적이었다.

'최고의 2루수' 로저스 혼스비가 지휘봉을 잡은 2년째인 1926년, 카디널스는 20여년간의 아픈 기억을 뒤로 하고 처음으로 내셔널리그를 제패했다. 이전 5년동안 세번이나 4할타율을 기록하는 등, 3할8푼대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었던 혼스비의 타율은 비록 .317로 급락했지만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고, 에이스 플린트 렘은 20승을 올렸다.

월드시리즈에서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밥 뮤젤이 버티고 있던 막강타선의 뉴욕 양키스를 만난 세인트루이스는 피트 알렉산더, 제시 헤인스가 이끈 투수진이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며 마침내 첫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줬다.

시즌이 끝나자 구단주와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혼스비는 뉴욕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됐지만, 이후 1931년까지 카디널스는 세번의 리그 우승과 월드시리즈 우승을 한번 더 차지하며 내셔널리그의 새로운 강자로 올라섰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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