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책의 흐름] 삶의 빛 문화로 찾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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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읽는다?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닌가?그림은 보는 것이면서도 읽는 것이다. 그림 또한 역사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역사(history)는 이야기(story)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지난해 내가 미술 읽기의 깊은 맛을 느낀 책의 하나가 미술사학자 노성두가 쓴 '천국을 훔친 화가들' 이다.

성서를 주제로 한 르네상스~바로크 시대의 서양 종교화를 다룬 이 책은 당시 교회의 제약과 예술적 창의 사이에서 고뇌했던 주요 예술가들을 조명했다.

저자는 당대의 미술양식이나 도상학적 관례뿐 아니라 성서, 그리고 성서의 개별적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입장을 두루 꿰뚫고 있는데, 이는 상당히 광범위한 공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살뜰한 지식이 감지된다.

이렇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림도 읽고 종교도 읽는다. 그것은 곧 세상 읽기고, 인간 읽기다. '행복한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샤갈의 종교화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샤갈이 성서를 읽는다. 그러면 그의 독서는 곧바로 한줄기 빛이 된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종교.철학.역사.정치.경제 그 모든 것을 다 읽을 수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빛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우리가 얼마나 그 읽기에 진실되게 몰입하느냐의 문제다. 올 한 해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이 빛을 볼까. 경제위기니, 원칙과 질서의 붕괴니 하는 한탄이 하늘에 메아리치는 이 때에.

나는 빛을 본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혹한 속에서도 미술관 관람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고, 새로운 경제위기가 운위되는 요즘도 그 기세는 꺾일 줄 모른다. 미술 관련 출판물의 종수와 부수는 해마다 늘고 있고, 이를 즐기는 독자의 수도 그만큼 확대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천국을 훔친 화가들' 같은 뛰어난 '그림 읽기의 안내자' 가 늘어난 탓이 크다. 단순히 그림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읽고, 그로 인해 세상과 자기 자신도 낱낱이 읽으려는 우리 사회의 욕구가 그만큼 확장돼온 것이다.

전시장과 연주회장을 찾는 꾸준한 발길들과 예술서적들을 찾는 분주한 손길들에서 우리는 어떤 가능성을 본다. 문화란 한가한 여유가 아니고,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임을 사람들이 점차 깨치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꿈길에 접어들듯이 예술 읽기와 인생 읽기는 결국 꿈 읽기로 이어지고, 위대한 독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꿈 읽기를 놓치지 않는다. '천국을 훔친 화가들' 은 먼저 그 꿈부터 훔쳤던 인간들인 것이다.

수난 중의 예수 얼굴이 수건에 새겨진 엘 그레코의 그림 '베로니카' 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천국을 훔친 화가들' 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해 울라" 는 예수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꿈을 읽는 이는 곧 미래를 읽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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