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17세 입대한 월맹군 … 이 소설 쓰려고 살았나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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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0일 베트남 하노이 자택에서 만난 바오 닌. 그는 “전쟁의 반대는 평화가 아니라 일상이다. 전쟁이란 평범한 일상을 한 순간에 단절시키는 끔찍한 것”이라고 했다. [사진 도서출판 아시아]

베트남전쟁(1960~75)이 끝난 지 어느덧 37년이 흘렀다. 전쟁 직후 수도 하노이는 폐허였다. 마을은 폭격에 휩쓸렸고, 도시의 골목에선 시체가 썩었다. 전쟁의 땅은 슬픔의 땅이었다. 한 세대가 훨씬 넘게 흐른 지금, 하노이에서 슬픔의 표정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 도시는 지금 신흥개발국의 심장으로서 팔딱대는 중이다.

 하지만 『전쟁의 슬픔』의 베트남 작가 바오 닌(60)은 달랐다. 요란한 도시의 한 구석에서, 그는 전쟁의 슬픔에 오래 붙들려 지냈다. 10일 밤 하노이에서 만났을 때, 그는 “나는 결코 전쟁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고 여러 번 말했다.

 바오 닌의 집은 하노이 중심가에서 가까웠다. 좁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가자 4층짜리 베트남식 가옥이 나왔다. 전쟁 때 사라졌던 마을이다. 미군의 B52 전투기가 폭격으로 쓸어버린 곳에 새로 마을이 들어섰다. “인간의 삶이란 이토록 빨리 복구되는 것”이라며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전쟁의 슬픔』(1991)은 바오 닌의 대표작이다. 최근 한국어로 번역돼 출간됐다. 아시아 출판사가 ‘아시아 문학선’을 시작하면서 1번으로 이 작품을 골랐다.

 바오 닌은 17세 때 베트남 인민군에 자원 입대했다. 69년부터 6년간 전투에 참여했다. 같은 소대원 가운데 그를 포함해 단 두 명만 살아남았다. 당시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 바로 『전쟁의 슬픔』이다.

 “끔찍한 죽음의 현장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걸 보면 결국은 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 살아남은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의 참혹함과 사랑의 애잔함을 함께 그렸다. 주인공 끼엔이 전쟁터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여정이 서사의 큰 줄기다. 그러나 단순한 전쟁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그 중심은 연인 프엉과의 사랑이다. 소설은 생생한 전장(戰場) 묘사로 충실하거니와, 총성 가운데 피어 오르는 사랑의 비가(悲歌)로 끝내 가슴을 무너뜨린다.

 이 소설이 베트남전쟁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지녔음에도,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일본어 등 16개 언어로 번역돼 세계 독자들의 마음을 훔친 것도 그 때문이다. 『전쟁의 슬픔』은 2008년 영국번역가협회가 선정한 ‘20세기 세계 명작 50선’에 들었고, 베트남작가협회 최고 작품상(1991), 일본 닛케이 아시아문학상(2011) 등 각종 문학상을 받았다.

 “과거 베트남에선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한 전쟁소설만 쓰여졌습니다. 내 작품은 인류가 공감할 만한 인간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름은 이 소설의 시련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쟁의 슬픔』은 91년 출간 당시 ‘사랑의 숙명’이란 제목으로 나왔다. 당의 압력 때문이었다. 93년에야 원래 제목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듬해 미국에서 영어판이 나오자 “제국주의에 면죄부를 줬다”며 판매 금지를 당했다. 판금 조치가 풀린 건 2005년부터다. 해외에서 호평이 쏟아지고, 바오 닌이 세계적인 작가로 떠오르면서다.

 그래서 바오 닌은 ‘전쟁의 슬픔’이란 제목에 애착이 강하다. 한국판의 제목을 바꾸려고 하자 반대 뜻을 밝혔을 정도다.

 “베트남에서 전쟁의 슬픔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베트남 사회의 최악의 문제는 모두 전쟁에서 비롯된 것이죠. 전쟁이란 겪지 않은 사람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쟁을 딱 하루만 겪어도 인간은 파괴됩니다.”

 하노이의 작가에게 전쟁의 슬픔은 지울 수 없는 운명으로 남은 듯했다. 그 운명을 바라보는 서울의 기자는 착잡했다. 대한민국에도 전쟁의 슬픔은 그치지 않았다. 한반도는 지금 휴전 중이다. “한국이 분단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는 말했다.

 하노이의 밤은 오토바이 소리로 소란했다. 베트남에서 한반도의 슬픔을 떠올리는 일은 애달팠다. 하노이의 작가와 서울의 기자는 밤늦도록 쓸쓸한 술잔을 부딪혔다.

◆바오 닌(Bao Nihn)=1952년 출생. 본명은 호앙 어우 프엉. 열일곱에 베트남인민군에 자원 입대, 소대 지휘관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6년간 최전선에서 싸웠다. 첫 장편『전쟁의 슬픔』은 2011년 현재 베트남에서 읽히고 있는 모든 책을 대상으로 한 ‘가장 좋은 책 상’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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