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조원의 저주인가 … 저축은행 ‘대마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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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대마불사’가 아니라 ‘대마필사(大馬必死)’ 수준이다. 지난 1년간 세 차례의 구조조정을 통해 퇴출됐거나 문을 닫게 될 위기에 처한 20개 저축은행 얘기다.

 6일 영업정지된 4개 저축은행 가운데 세 곳(솔로몬·한국·미래저축은행·지난해 기준)은 자산 규모가 2조원이 넘는 대형 저축은행이다. 지난해 1·2차 저축은행 구조조정에서도 자산규모가 2조원에 달하는 대형 저축은행과 계열사가 살생부 명단에 올랐다.

 지난해 1월부터 이달까지 17개월간 퇴출된 저축은행 20곳 가운데 6곳이 자산 규모 2조원을 넘는다. 이로써 자산 규모가 한때 5조원이 넘는 독보적인 1위였던 솔로몬저축은행을 비롯해 토마토·제일·부산 등 손꼽히던 대형 저축은행이 모두 시장에서 쫓겨나게 됐다. 90여 개 저축은행 가운데 자산 규모 2조원 이상인 곳은 이제 현대스위스·HK·경기 등 세 곳만 남게 됐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2조원’의 저주라는 말까지 나온다. 저축은행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은 건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이었다. 저축은행 도약의 발판이었던 PF는 저축은행 부실의 올가미가 됐다.

 PF는 대표적인 고위험·고수익 투자로 꼽히는 상품이다. 이들 저축은행은 PF대출을 지렛대 삼아 몸집을 수조원대로 불렸다. 하지만 결국 부동산 경기 침체로 PF가 부실화되면서 시장에서 쫓겨나는 처지가 됐다. 실제 이들 저축은행은 계열사를 포함해 PF 대출 잔액이 1조원을 넘는 곳이 많다. 부산저축은행의 경우 PF 잔액이 4조3490억원에 이르기도 했다.

 2000년대 중반 신용카드 사태로 소액 신용대출 부실이 커지자 저축은행은 고위험·고수익인 PF대출에 눈을 돌렸다. 당시 부동산 시장의 활황으로 기껏해야 1인당 300만원 정도에 불과했던 소액 신용대출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익이 짭짤했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시장에 한파가 몰아닥치면서 PF대출은 부실로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저축은행의 부동산 PF 대출 연체율은 2006년 10.9%에서 지난해엔 두 배(3월 22.8%) 이상으로 급증할 정도였다.

 이처럼 저축은행이 PF에 베팅하며 몸집을 키웠던 데는 금융 당국의 규제완화가 큰 역할을 했다. 저축은행은 특정 회사에 80억원 이상을 대출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금융 당국은 2006년 8·8클럽(BIS 자기자본비율 8% 이상, 고정이하 여신 8% 이하)에 해당하는 저축은행에 대해서는 이런 규제를 풀었다. 전문가는 “이는 리스크 관리가 허술한 저축은행이 거액의 대출을 해주는 수단으로 악용돼 재무건전성 악화라는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평가한다.

 서강대 경제학과 남주하 교수는 “그간 소액 대출 중심으로 영업해온 사람이 규모가 좀 커졌다고 전문성·경험도 없이 PF 대출을 확대한 것 자체가 무모한 것”이라며 “금융 당국에서 대출 한도 규제를 풀어준 게 결론적으로 보면 저축은행 부실화 공범에 가까운 행동을 하게 된 셈”이라고 꼬집었다.

 2000년대 중반 부실 저축은행을 정리하면서 우량 저축은행에 떠넘긴 게 이번 사태의 시발점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실 저축은행의 뒤처리를 맡으면서 건실했던 저축은행까지 덩달아 재무구조가 망가졌다는 것이다.

금융 당국은 2005년 저축은행 간 인수·합병(M&A)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던 감독규정을 개정해 대형 저축은행이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다. 또 부실 저축은행을 떠안는 저축은행에는 자신의 영업구역 밖에서 지점을 추가로 열 수 있도록 해주는 식으로 인센티브도 줬다. 수익원 찾기에 혈안이 된 저축은행들은 새로 저축은행을 인수하면서 몸집 불리기에 나섰다. 그 결과 2008년까지 8건의 M&A를 거치면서 부산·솔로몬·한국저축은행 계열 등 7개 계열 저축은행이 탄생했다.

 저축은행에 시중은행과 동일한 수준인 5000만원의 예금 보장을 적용해 모럴 해저드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홍익대 경영학과 선우석호 교수는 “문제의 저축은행은 예금 보장을 앞세워 시중은행보다 높은 금리로 예금을 끌어 모았고, 이 돈이 PF 대출과 같은 고위험 투자에 쓰였다”며 “정부에서 제공한 인센티브를 가지고 도박을 하며 규모를 확장한 격”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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