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세서 시장에서 '인텔'독주 끝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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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프로세서 제조업체이자 마이크로소프트사와 함께 전세계 컴퓨터 분야의 지배자라 불리는 인텔에게 올 한 해는 뒤돌아보기조차 싫은 끔찍한 해였다. 마치 지난 세기의 영광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듯 21세기 벽두부터 인텔은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첫 번째 도전장은 먼저 AMD(Advanced Micro Devices)에서 날아왔다. 지난 3월 6일 AMD는 인텔을 간발의 차로 제치고 세계 최초로 1GHz 애슬론 프로세서를 내놓았다. 1GHz의 벽은 단순히 누가 더 빠른가라는 차원을 떠나 차세대 프로세서 시장의 패권을 누가 거머쥐느냐는 상징적인 의미가 숨어있다. 인텔은 그 첫 승부에서 AMD에게 허를 찔린 것이다.

폭풍 전야 맞는 프로세서 시장

두 번째 도전장의 주인공은 ‘크루소’라는 모바일 프로세서를 들고 나타난 실리콘밸리의 신생 벤처기업 트랜스메타. AMD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데스크톱과는 달리 노트북용 모바일 프로세서는 인텔이 거의 독점하고 있는 상황으로, 인텔을 향한 포성을 멈출 날이 없는 AMD 마저 승부를 미루고 있는 시장이다.

트랜스메타의 크루소 프로세서는 저발열/저전력을 무기로 그동안 인텔이 간과하고 있던 틈새 시장을 노렸고, 소니, IBM, NEC, 후지쯔 등 굴지의 노트북 제조업체들이 이미 크루소 칩을 장착한 노트북 컴퓨터를 시판하거나 곧 채택할 예정으로 있다. 불과 1년 동안 무명의 벤처기업에서 인텔을 위협하는 위치에까지 올라선 것이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프로세서 시장에서 인텔의 강세는 여전하겠지만, 더 이상의 독주는 없을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이미 인텔의 펜티엄 프로세서는 성능은 물론 가격 면에서도 차츰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것.

지난 해부터 인텔은 고질적인 수율 문제로 공급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으며, 특히 최신 프로세서의 경우 출시를 공표한 지 서너 달이 지나도록 시장에서 구경조차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구나 최근 인텔은 1.13GHz 펜티엄Ⅲ 프로세서의 리콜 사태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실제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주력 제품인 하이엔드 펜티엄Ⅲ 프로세서의 리콜 조치는 인텔로서는 심각한 수치이자 경쟁사인 AMD에게는 기막힌 선전거리를 준 셈이다.

인텔 셀러론 프로세서는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성능으로 저가 보급형 PC 시장을 휩쓸고 있다. 뒤늦게 AMD 역시 듀론 프로세서를 내놓았지만, 애슬론의 선전과 달리 셀러론의 아성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CNET의 조 윌콕스(Joe Wilcox) 기자는 “셀러론이 인텔의 효자상품이긴 하지만 마진이 낮다는 점에서 또 다른 고민거리를 인텔에게 안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트북용 모바일 프로세서 쪽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트리마시아(Primasia) 증권의 컴퓨터 담당 투자 분석가인 비키 튜(Vicky Twu)는 “비록 크루소 장착 노트북의 출하량이 많지는 않지만, 시장의 반응은 매우 좋다”고 전제하며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인텔이나 AMD도 그러했듯 크루소 프로세서도 점차 개선될 것이고 AMD에 이어 인텔을 위협하는 차세대 다크호스로 부각될 날도 멀지 않았다”며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인텔 역시 변화의 흐름을 인식하고 있다. 나름대로 프로세서 시장의 우위에 만족하지 않고 신규 시장을 개척하거나 신형 프로세서를 내놓는 등 변화에 대한 준비를 차곡차곡 진행하고 있다. 지난 11월 20일 내놓은 펜티엄4 프로세서는 그와 같은 인텔의 희망이 담겨있는 신제품이다.

전과 달리 첫 반응조차 신통치 않은 분위기지만, 늘 그래왔듯이 내년 중반기 이후면 애슬론의 거센 도전에도 불구하고 펜티엄4는 시장의 주력 제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수렁에서 헤매는 인텔, 그 탈출구는?

인텔의 변화를 프로세서 분야에서 찾지 않는 시각도 주목할 만하다. 인텔은 최근 몇 년 동안 비 프로세서 분야에도 꾸준한 투자를 해왔다. 리눅스와 무선 네트워크 시장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인텔은 MS의 윈도 시스템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리눅스 시장에도 많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으며, 실제로 상당한 투자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텔은 터보리눅스(TurboLinux), 레드햇(Red Hat), 수세(SuSE), 코발트 네트웍스(Cobalt Networks) 등의 리눅스 관련 기업은 물론 국내 벤처기업인 리눅스원에게도 5백만달러를 투자했다. 인텔이 리눅스에 이처럼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유는 독자적인 운영체제를 가지고 있는 HP, IBM, 썬 같은 경쟁사 못지 않은 강력한 운영체제를 손에 쥐고자 함이다.

리눅스가 잠재적인 가능성에 대한 대비라면, 무선 네트워크 분야는 프로세서 시장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시장을 형성하고 있어 인텔로서는 놓칠 수 없는 사냥감이다. 인텔은 이미 이동전화의 주요 부품인 플래시 메모리와 내장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생산하고 있으며, 투자를 더 늘리고 있다.

인텔의 무선 부문 책임자인 론 스미스(Ron Smith)는 “현재 이동전화 제조업체들은 흔히 자사의 칩을 직접 설계하고 있지만, 앞으로 기기가 복잡해지고 설계 주기가 짧아질 뿐만 아니라 표준화 문제도 발생할 것. 자연히 칩 자체는 외부 업체에게 조달 받는 것이 더 쉬워 질 것”이라 전망하며 인텔이 그 대안으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앤디 그로브(Andy Grove) 인텔 회장 역시 무선 분야가 인텔에게 두 번째로 큰 고객이라고 말하면서 “인터넷은 실리콘 칩을 기반으로 움직인다. 우리의 의도는 인터넷의 모든 것이 인텔 제품을 기반으로 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부정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대만의 컴퓨터 업체 에이서 인포메이션(Acer Information Products Group)의 사이먼 린(Simon Lin) 사장은 “인터넷TV, PDA, 기타 포스트 PC 시장에서는 윈텔(MS, 인텔)보다 다른 업체들의 프로세서와 운영체제가 더 많이 이용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린 사장은 “마케팅 관점에서 윈텔 이외 업체들은 2, 3년 전에 비해 비교적 유리한 상황을 맞고 있다. 소비자들과 응용기기 업체들은 윈텔 외의 대안을 보다 적극 고려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텔의 공급 문제와 소비자들이 점점 다른 프로세서에 눈을 돌리고 있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처럼, 그동안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인텔의 영광에도 찬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이번 라스베이거스 컴덱스 2000에서도 드러난 바와 같이 차세대 정보기기의 주력이 서서히 PC에서 인터넷 응용 기기 쪽으로 옮겨 가고 있어 더욱 그렇다.

PC용 프로세서에 전력을 다해온 인텔로서는 지금까지 공들여 쌓은 탑을 고스란히 내주게 될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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