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바로 보자] 上. '3년전 고통' 벌써 잊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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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엔 경사가 많았다.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았으며, 아시아와 유럽 26개국의 정상들이 서울을 찾았다. 서울의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는 유난히 잦고, 화려했다.

그러나 이제 축제는 끝난 것인가.

나라 전반에 위기감이 스며들고 있다. 신문.방송의 헤드라인 뉴스는 무엇이 안되며, 늦어지고, 어려워졌다는 소식이 대부분이다.

시장은 제구실을 못하고, 국민의 걱정도 쌓여간다. 반환점을 돌아선 국민의 정부의 국가경영 능력에 대한 신뢰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위기의 진원은 역시 경제다. 어제는 동아건설이, 오늘은 현대건설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고 있다. 우량기업들조차 살아남기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전문가건, 서민이건 위기를 말한다. 여론조사마다 경제를 위기로 본다는 응답은 80%를 넘고 있다. 통계는 다르다해도, 분위기는 3년 전 환란 전야를 닮아가고 있다.

경제만의 위기가 아니라는 점은 더 큰 문제다. 정치.사회적으로도 답답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의약분업 파문은 4개월째 수습되지 않고 있다. 여야간.노사간의 공방은 게임의 룰은 뒷전인 채 감정적인 대립구조로 흐르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정 전반을 '경쟁력 향상' 의 관점에서 평가해 보면 위기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 통계와 시장이 경쟁력의 수준을 낱낱이 보여주는 경제부분이 특히 그렇다.

지난 8월 개각 때 경제팀 수장 후보에 올랐던 김종인(金鍾仁)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그간 거시지표는 미국의 호황 등 해외요인이 좋았던데다 1백10조원대의 공적자금을 투입한 덕택에 반짝효과가 나타났던 것일 뿐" 이라고 말한다.

불과 2년만에 성장률이 10%를 웃돌고 벌어들인 달러로 7백억달러 이상의 외환보유액을 쌓은 실적이 사실은 '경쟁력 개선' 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는 지적이다.

수출이 좋았다지만, 한국은행은 환란전 달러당 8백원대이던 환율이 1천2백원대를 훌쩍 뛰어넘으면서 나타난 가격경쟁력으로 헐값 수출을 했던 덕분일 뿐 기술이나 품질개선의 효과는 큰 게 아니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구조조정의 성과를 대표하는 대기업들의 부채비율도 마찬가지다. 살아남은 30대 그룹이 정부 요구대로 지난해 말까지 부채비율 2백%를 맞춘 것으로 발표됐다. 그러나 기업들은 빚은 그대로 두고 주식과 채권으로 자기자본을 늘려 부채비율을 낮추는 편법을 택했다.

정부나 정치권도 국가경쟁력 향상에 기여도를 따질 입장이 아니다. 구조조정 관련법안이나 추가 공적자금 조성을 둘러싸고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만 급했을 뿐 생산성은 뒷전이었다. 정부와 정치권이 신뢰를 잃으면서 경제가 흔들리고, 국민은 '개혁' 에 염증까지 느끼고 있다.

함성득 고려대 교수는 이제 "개혁은 소수의 개혁목표를 추려 명료하게 잡고 그것만은 반드시 해내야 한다" 며 "보좌조직도 충성심 위주에서 전문성 위주로 바꿔야 한다" 고 강조한다.

최근에는 그동안 원군이었던 대외여건마저 반전하고 있다. 미국 경제의 후퇴조짐이나 고유가, 반도체시세 폭락 등이 위기의식을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진념(陳稔)재정경제부장관은 "적당한 위기의식은 좋은 자극제가 될 수 있다" 고 말한다. 그러나 서둘러야 한다.

이윤호(李允鎬)LG경제연구원장은 "위기의식이나 불안심리가 도를 지나치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 면서 "위기의 실체를 파악하고, 원칙과 초심으로 돌아가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 고 주문한다.

손병수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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