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종의 미술 투자] 용량 1500cc 뇌의 무한 확장…정수진 ‘뇌해도’의 마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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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는 불후의 명작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 소설을 이광수의 『무정』 이후 최고의 장편 소설로 꼽는다. “공문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 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이 없는 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로 모여든다”는 박상륭 특유의 문장은 절창이다.

 더욱이 소설을 쓰고 ‘죽음의 한 연구’라는 학술적인 제목을 붙인 것부터 강렬하다. 우리는 학문적으로 정의된 것에 많이 익숙하다. 이문구의 『관촌수필』은 수필이 아니라 소설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의 한 연구』는 연구서가 아니라 소설이다. 이문구나 박상륭이 자신들이 하고 있는 문학이 어떤 것인지 몰라 그런 제목을 붙인 것은 아닐 것이다. 문학의 장르를 말하듯 그림에서도 우리는 추상과 구상을 굳이 나눈다. 팔레트에 짜 놓은 물감을 확대해 추상적인 이미지를 얻은 리히터의 그림은 극사실주의적 구상인가, 추상인가? 권순철이 파란 강의 표면만 그려놓은 그림은 구상인가, 추상인가?

 미술사가들은 무엇을 정의하고 그러한 틀에 맞춰 해석하는 것에 익숙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화가 정수진의 작품들을 보면 그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으며 그의 예술혼이 어떤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추상과 구상으로 구분돼 자신의 작품을 보며 감상자들의 상상력이 제한되는 것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육신은 저주지만 그래서 또한 은총”이라는 박상륭 역시 이런 뜻일 게다. 인간 정신이 추구하고 갈망하는 무한 자유에 비하면 제한된 육신의 한계는 분명 저주다. 그러나 그 저주인 육체야말로 지상에서 인간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에 그것은 은총이다. 그 답답한 육신이 없는 죽은 사람에게 무한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의 상상력은 뇌라는 작은 공간에서 무한히 반복된다. 그 무한 상상력은 바다보다 넓다. 바다가 제아무리 넓어도 지구상의 모든 바다는 깊이와 넓이를 측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용량 1500cc의 조그만 인간의 뇌는 무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어 가늠조차 되지 않는 공간이다.

 『죽음의 한 연구』는 평이한 문체지만, 읽을수록 깊이를 더해가는 매력 있는 글이다. 그러나 빠져들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의 인내를 요한다. 2000년에 그려진 정수진의 ‘뇌해도’ 시리즈 일곱 점 역시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마력이 있다. 우리들의 육신은 생물학적으로는 내배엽과 외배엽으로 구성된 세포분열의 일종이다. 정수진의 ‘뇌해도’에 자주 등장하는 까도 까도 나오는 양파는 알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암시한다고 생각된다. 끊임없는 분화를 통해 완전에 이를 수 있다는 상징이다. 이렇게 영겁을 통해 반복되는 완전으로의 갈망을 글로 쓴 것이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라면,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정수진의 ‘뇌해도’다.

 2005년 6월 충남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서는 독일의 ‘뉴 라이프치히 화파’의 소규모 전시가 있었다. 지금은 현대 미술의 전설이 돼버린 네오 라우흐의 그림도 전시됐다. 당시 네오 라우흐의 전시 작품 가격은 1억원 남짓이었다. 현재 네오 라우흐의 대표작품은 최소 10억원을 넘고 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개인 컬렉터는 살 수 있는 기회조차 얻기 힘든 형편이다.

 정수진에게 네오 라우흐를 넘어서는 위대함이 있다는 것은 나 개인만의 생각일까. 김현 같은 전문가도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일주일에 걸쳐 정독했으며, 완전히 감동했다고 한다. 나는 10여 년 넘게 정수진의 그림을 보아 왔고, 완전히 감동했다. 누가 그의 그림에 온기가 없다 했던가. 당신은 얼마나 더 뜨거워야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담은 그림이 따뜻하다 느낄 수 있는지. 생각이 있어도 표현력이 부족하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표현력은 좋으나 생각이 없어도 안 된다. 정수진의 ‘뇌해도’는 불후의 명작이다.

서연종 하나은행 삼성역 지점장 wisha11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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