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플리즈웨이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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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용환
베이징 특파원

그날 오전 베이징 인민대회당 2층 계단 앞은 내외신 기자 100여 명의 고성으로 가득했다. 보안요원들과 인민대회당 신문국에서 보시라이(薄熙來) 충칭시 당서기의 기자회견장 출입을 막아서자 기자들의 항의가 들끓었다. 부총리 출신인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출세 가도를 달린 보시라이는 오는 가을 교체되는 공산당 지도부의 한 축을 맡을 것으로 확실시되던 태자당의 핵심 인물이었다. 하지만 최측근의 배신으로 장밋빛 미래가 물거품이 될 위기에 몰렸다. 당 중앙에는 사직서가 제출되고 엄정한 조사까지 받았다는 전언이 나돌았다. 기자회견 하루 전 보 서기는 당 정치국 인사가 전원 참석하는 큰 행사에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밤새 보 서기의 실각이 기정사실화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현역 태자당 파벌의 2인자인 그의 낙마는 파벌 간 권력 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을 의미한다. 9일 아침 기자회견을 앞두고 기자들의 몸이 달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다.

 중국 내외신 10여 개사로 제한한 기자회견장. 중앙일보·JTBC가 초빙돼 보 서기의 일거수일투족을 영상 카메라에 담았다. 보시라이는 시종 당당했다. 정치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던 항간의 소식들은 사실과 달랐다. 사직서 관련 얘기도, 피조사설도 단호하게 부정했다. 이 사건이 지도부 입성에 장애가 될 것이란 관측도 거침없이 반박했다. 이런 발언이 공식석상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진상은 한층 명확해졌다. 공산당의 분열을 열망하는 호사가들의 입담이 진실을 가렸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이번 사건은 구중궁궐 같은 중국 취재의 난맥상을 보여 주는 단면에 불과하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중국을 통해 북한을 들여다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지난달 북·미 3차 고위급 회담차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베이징에 들렀다. 관영 중국중앙방송(CC-TV)에만 출입이 허용된 공항 VIP 통로로 김 부상이 걸어 나왔다. 회담의 전망을 물으며 CC-TV 기자(천후이후이·陳慧慧)가 바짝 옆으로 붙자 김 부상이 한마디한다. 하지만 주변 소음과 섞이면서 앞부분이 잘린 채 ‘웨이트(wait)’만 방송에 잡혔다. 이를 두고 일부에선 ‘우리는 기다릴 것(We will wait)’이라고 말했다며 북한이 회담에서 고도의 탐색전을 펼 것으로 풀이했다. 협상전략을 드러낸 발언으로 의미 부여하기도 했다. 하루 뒤 취재현장에서 만난 천후이후이 기자에게 물었다.

 “그때 김 부상이 한 말이 뭐였나.”

 “‘좀 기다려 달라(Please wait)’던데.”

 기자가 끈질기게 따라붙자 때가 되면 알려 주겠다는 뜻으로 즉답을 피해 간 것이다. 올해는 지도부 교체로 중국의 정치사회적 변수가 커지고 있다. 김정일이 급사하면서 북한도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다. 뉴스 접근에 비상한 경각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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