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친구 사귀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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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호 30면

서울 생활 9년째다. 그동안 많은 친구를 만나고 떠나보냈다. 환영식과 환송식의 연속이었다. 새 친구를 사귀고 오랜 친구를 떠나보내는 것은 서울에 사는 외국인이 느끼는 향수병과 문화적 충격의 일부다. 슬프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한국 생활 초기, 경기도 수원 인근에서 영어강사로 일했다. 당시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집 인근의 편의점에서 다른 영어강사를 만나면 쉽게 이야기를 나눴고, 어느새 친한 친구가 됐다. 낯선 한국 땅에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다는 의식 덕분이었다. 비슷한 일을 하고,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고 심지어 같은 편의점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과 의미 있고 소중한 관계를 유지했다. 멀리 미국 고향에 있는 친구를 그리워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어떤가. 영어강사를 그만둔 지 5년 정도 됐는데, 언젠가 문득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네 편의점에 들어가 다른 외국인을 봐도 거의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말을 건네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간혹 간단한 인사를 나누어도 예전에 수원의 편의점에서와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동질감도 없고, 뭔가를 공유한다는 의식도 없다.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이렇게 변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두 가지 요인 때문일 것이다.

첫째,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떠난 뒤 보다 전문적인 일을 하면서 영어강사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예전만큼 관심이 없어진 것이다. 시간은 소중하다. 관계 형성에 시간을 쏟아야 한다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듯하다.

둘째, 서울이라는 도시의 거대함 때문이다. 서울에서 친구 사귀기는 쉽지 않다. 서울에는 다양한 외국인 커뮤니티가 있지만 수원에서 느낀 것 같은 응집성은 아니다. 수원에서만큼 영어를 할 줄 아는 친구에 대한 절실함도 없다. 내 주변에 이미 많기 때문이다.
수원을 떠나 서울에서 지내면서 어느 순간 ‘친구 관계가 예전만 못하구나’라고 느꼈다. 만나고 헤어지는 환송·환영식엔 참석했지만 마음은 예전 같지 않았다. 일이 바빠 친구들을 만날 시간을 내기도 힘들었다.

지난해 초 한 친구에게 이런 느낌을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서울국제여성협회(SIWA)라는 단체에 대해 말해 줬다. 주한 외교사절의 부인, 전문직 여성 등의 모임이다. 그녀는 SIWA에서 많은 친구를 만났다고 했다. 즐거운 곳이라고 했다. 모임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 참여를 권했다. 협회 산하 직장여성 분과위원장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는데 회장도 맡아 보라고 했다. 일에 바쁜 내가, 모임을 즐기고 회장직을 제대로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하기로 했다. 1년 전쯤 일이다.

SIWA에서 권리를 침해받은 여성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한다. 비슷한 직업을 가진 여성들끼리 고락을 나누며 우정을 다진다. 직장여성 분과위원장으로서 월 1회 서울에 사는 전문직 여성 네트워크 확대를 위한 모임을 주재한다. 한 번에 30여 명이 모인다. 아이디어와 영감이 넘치는 즐거운 자리다. 내가 오랫동안 찾던 친구들이 있는 곳이다. 한국 생활 초기, 수원에서 영어강사를 하며 사귀었던 친구들에게 느꼈던 친근함을 되새긴다. 이런 곳에서 의미 있고 소중한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SIWA 모임에 참석하고 일하는 직장여성 분과를 이끄는 것이 무척 즐겁다. 내게 협회를 소개해 준 친구처럼 나도 점점 모임에 빠져드는 것 같다. 좀 더 일찍 SIWA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다.

더 많은 외국인 여성이 SIWA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서울에서 당신이 만나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있는 곳이다.


미셸 판스워스 미국 뉴햄프셔주 출신. 미 클라크대에서 커뮤니케이션과 아트를 전공했다. 세종대에서 MBA를 마치고 9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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