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980년대의 소년, 오늘의 세상을 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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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3월입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을 헤집고 푸릇푸릇 새싹이 돋을 겁니다. 생명과 부활의 시기입니다. 굳이 인생에 비유하면 청춘쯤에 해당할까요. ‘88만원 세대’의 힘겨움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고단한 현실에 무릎을 꿇을 수는 없겠죠.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함께하는 ‘이달의 책’ 3월의 주제는 ‘열려라, 청춘의 문’입니다. 젊음의 방황과 성장을 다룬 한국 소설을 골랐습니다. 우리의 오늘을 읽을 수 있습니다.

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문학동네
321쪽, 1만2000원

누구나 초능력을 꿈꾼다. 유리겔라의 초능력 쇼에 홀딱 빠져 숟가락 구부리기에 열을 올리던 15살 소년 정훈이도 그랬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독심술을 갖게 되기 전까지는.

 소년은 놀라운 능력을 가진 ‘원더보이’가 됐지만 엄혹하고 뒤틀린 시대인 1980년대, 초능력은 오히려 고통이 된다. 그의 독심술을 수사에 활용하려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들어간 정보부 고문실에서 소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파괴되는 광경’에 몸서리를 친다.

[일러스트=강일구]

 정보부 권대령에게서 도망친 뒤 우연한 만남이 이끄는 세상 속으로 들어간 소년. 정치 사찰과 고문, 운동권 학생들의 투쟁 등 시대의 아픔에 맞닿아 있는 주변 인물의 사연에 마음을 열면서 그의 초능력은 사라진다. 공감과 소통의 능력이 초능력을 대체한 셈이다.

 하지만 평범해진 소년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게 된다. “깨진 유리처럼 날카롭게, 세밀화처럼 선명하게, 해와 달처럼 유일무이하게 내 눈과 코와 입과 귀와 몸에 와 닿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웠다”고 털어놓는다. 그리고 가슴 뻐근한 사실을 깨닫는다. 슬픔과 슬픔이 더해지면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말이다.

 그런 까닭에 아름다운 세상은, 또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소년에게는 경이 그 자체다. 이 땅을 오고 간 무수한 존재 중 하나라는 이유로 ‘없는 셈 치고’가 아니라, 그 무수한 존재 중 하나라는 것만으로도 아주 특별하다는 것이다.

 세상에 눈을 뜬 소년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믿음과 소망, 사랑의 이야기임을 깨닫는다. “다시 돌아온 서울은 수많은 사람의 고민과 소망과 희로애락이 거미줄처럼 서로 뒤엉켜 한데 출렁이는 대양과 같았다. 천만 명의 사람들이 도시의 물결치는 삶 속에서도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는 걸 이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충분히 약했지만, 그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그들을 억세게 질기게 만들었다.” 시대의 상흔을 끌어안고 사는 소설 속 인물이 평온한 삶을 찾아가는 과정도 어쩌면 그 덕이다.

  몇 번의 계절을 보내고 맞으며 자란 소년은 자못 어른스러운 결론에 이른다. “우주에 이토록 많은 별이 있는 데도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우리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조숙한 이 소년이 내린 인생의 정의는 이렇다. “해가 지는 쪽을 향해 그 너른 강물이 흘러가듯이, 인생 역시 언젠가는 반짝이는 빛들의 물결로 접어든다. …(중략)…나는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인간은 누구나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고, 결국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그 빛들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우리 현대소설을 이끄는 작가 중 한 명인 김연수의 이 책이 성장소설을 넘어 삶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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