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 인사이트] 계열사 대표를 “김군!”이라 부르는 회장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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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안혜리
증권팀장

“어이, 김군!”

 중국집 주인 아저씨가 자식뻘인 아르바이트 배달 소년을 부르는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한 대기업 회장님이 계열 금융사 대표를 이렇게 불렀답니다. 기분 좋을 땐 점잖게 ‘김 대표’로 부르다가 뭔가 수가 틀리면 어김없이 ‘김군’이라고 했다는군요. ‘김군’으로 불린 분이 사표를 던지고 나온 후 “언짢은 기억이었다”고 말하는 걸 보면 친근감의 표시나 웃자고 한 농담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어느 회장님의 호칭 취향을 언급하는 건 요즘 동네북이 된 대기업 사정이 하도 딱해서입니다. 세상은 무섭게 변하는데 적지 않은 회장님들이 이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기업, 그리고 기업가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높이와 기대수준은 엄청나게 달라졌지만 종업원은 ‘김군’이고 기업은 내 소유물로 생각하는 회장님들이 여전히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변한 시선을 알았다면 대통령이 호통치기 전에 떡볶이나 물티슈 수입에 손을 뻗는 일도, 배임·횡령으로 법의 심판을 받는 와중에 인수한 기업의 사내이사로 선임돼 주주들의 반발을 불러오는 일도 삼갔을 겁니다.

 중요한 두 선거를 앞둔 ‘정치의 계절’을 맞아 여야를 막론하고 대기업 때리기가 한창입니다. 무덤 속에 들어갔던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 부활 이야기가 나오고, 재벌세를 물리자는 주장까지 등장합니다.

 자본시장연구원 김형태 원장이 재밌는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기업이든 정치든 권력을 세습하게 되면 주변의 시선이 세 가지 단계로 바뀐다고 합니다. 창업주에 대해선 대체로 그가 일군 성과를 인정해 ‘존경’한답니다. 2세는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존중’을 한다죠. 그럼 3세를 대하는 주변의 시선은 뭘까요. “넌 도대체 누군데?”랍니다. 3세 스스로는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받았던 존경과 존중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동으로 받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능력을 검증해 보이지 못하면 “넌 누구냐”는 따가운 시선만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기업인들에게 “넌 누구냐”며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보다 더 높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댑니다. 사외이사가 거수기로 전락해선 안 된다며 사외이사 후보 추천 위원에서 그룹 총수를 아예 배제하려는 금융회사들의 움직임도 있습니다. 회장님, 세상은 빠르게 달라지는데, 아직 ‘김군 패러다임’에 갇혀 있으신 건 아니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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