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사진 한장이 역사를 웅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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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가에서 가장 독자층이 엷다는 분야가 미술 관련서적이지만, 최근 몇년새 독자층이 형성되어 가는 긍적적인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진집은 이와 또 달리 여전히 취약한데, 말하자면 미술장르의 하위장르이자 '행랑채' 인 셈이다.

사진집〈그 때 그 사진 한장〉은 이런 궁핍함 속에서 나온 순도 높은 포토 저널리즘 성취로 평가할 만하다.

〈그 때 그 사진 한장〉은 1969년 이후 찍은 사진을 시기별로 편집했다.

시기는 제1장(1968-79년) 제2장(1980-89년) 제3장(1990-91년)의 식이다.

중요 사건별 망라주의 방식도 아니고, 작가가 일간지 사진기자(한국일보, 동아일보)로 근무하면서 얻었던 사진을 자기 나름으로 펼쳐놨을 뿐이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서 얻는 느낌은 예사롭지 않다.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을 정리하자면 현대사 속 우리의 집단적 기억들이 하나 둘씩 되살아난다는 측면이다.

그의 지론 대로라면 '오늘의 기념사진이 내일의 역사사진이 된다' 것이리라. 즉 분명 전민조의 사진이란 과장된 쉰 목소리의 증언이 아닌데도 이런 정서적 환기(喚起)가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진집 앞 쪽 '함석헌 옹' .1971년에 찍은 이 사진은 '만화로 보는 성서' 를 얹어놓은 앉은뱅이 책상 앞에서 태무심하게 쉬고 있는 평범한 노인 함석헌 선생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없었더라면 현대사가 또 얼마나 허전했을까 하는 느낌, 그러나 그런 '말과 언어의 맹장(猛將)' 이 일상 속에서는 이토록 편안한 보통 노인이었던가 하는 두겹의 느낌 같은 것…

경회루 앞에서 벌이는 자선 파티를 준비중인 육영수 여사의 모습이 담긴 '경회루 파티' (1972년)도 관심이 간다.

비교적 소박한 투피스 차림의 육여사가 문 앞에 서서 줄 지어선 채 눈도장을 찍으려했던 당시의 유명인사들을 맞고 있다.

육 여사 관련 사진으로는 그 사후 3년이던 1977년 불탄일에 이후락씨가 군중 틈에 끼어 눈을 감고 합장하고 있는 모습도 망원렌즈로 잡았는데 이채롭다.

이밖에 표지사진으로 된 가택연금 중인 김대중 당시 야당총재의 전화받는 사진(1987년), 여의도 TBS사옥 준공 파티장에서 모 연예인의 손에 부드럽게 입마춤하는 삼성 이병철회장의 노신사 모습(1980년)포착 등도 흥미롭다.

영화〈임자없는 나룻배〉의 이규환 감독의 병상 표정(1982년)원로 시인 미당 서정주 선생이 짐짓 지어보이는 위악적(僞惡的)표정 등도 오래 여운이 남는다.

"전민조의 사진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행간을 읽는다" 는 평론가의 말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전민조는 〈서울 스케치〉〈얼굴〉〈이 한장의 사진〉등의 사진집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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