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궁] 금밭 숨은 주역 유학생 정낙조씨

중앙일보

입력

한국 여자 양궁 대표팀이 올림픽에서 승승장구하는 데는 남몰래 땀흘린 주역이 있었다. 호주 유학생 정낙조(35)씨.

국내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지난 1월 시드니로 유학을 떠난 정씨는 우연히 자신의 집이 양궁 경기장 길 건너편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씨는 이후 e-메일을 통해 현지 날씨와 바람의 방향을 분석하는 첨병 역할을 자청했다.

"베란다에서 경기장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데 바람이 너무 심하더라고요. 양궁하면 단연 한국인데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무조건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지요. "

지난 7월부터 정씨는 매일 오후 3~5시 집 앞의 나무와 깃발을 잣대 삼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꼼꼼히 기록했다.

그 시간대에는 바람이 3시에서 9시 방향이나 4시에서 10시 방향으로 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오랜 관찰의 결과였다.

여자대표팀 장영술 감독에게 바람의 방향을 분석한 보고서를 무려 40여차례 보냈다. 전문 지식은 없지만 장감독이 원하는 사항을 일일이 점검해 보고서에 담았다.

또 경기장 안 스탠드에서 사대(射臺)까지 거리나 스탠드 사이 사이의 공간이 얼마나 되는지도 확인해 알려줬다.

실제로 21일 오후 벌어진 여자 단체 8강전에서는 바람이 3시에서 9시 방향으로 불어 정씨의 분석이 정확했음을 입증했다.

정씨는 또 추석날 여자선수들을 집으로 초청해 송편을 대접했고, 훈련 기간에 집을 선수들의 휴식처로 제공했다.

"아무나 금메달을 따는 게 아니더라구요. 한국 여자 양궁이 세계 정상에 서기까지는 지도자들의 치밀한 전략과 과학적인 분석이 밑거름이 됐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1일 경기장에서 한반도기를 들고 여자 양궁 대표팀을 열렬히 응원하던 정씨는 "양궁장에서 앞으로 애국가를 한번만 더 들을 수 있다면(남자단체전 우승) 좋겠다" 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