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싱] 김영호, 금메달 획득 순간

중앙일보

입력

14-14. 이제 마지막 1점이다. 순간의 방심이 메달의 색깔을 바꾼다.

비스도르프를 일방적으로 응원하는 독일 관중의 함성이 경기장을 휘감고 있지만 검객 김영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온 정신을 칼 끝에 집중할 뿐이다.

짧은 순간 17년동안 눈물겨웠던 펜싱인생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메마른 빵조각을 함께 씹어야 했던 동료, 후배들의 응원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고향 논산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홀어머니의 굽은 등이 떠올랐다. "최선을 다하고 돌아오라"며 짐을 꾸려주던 아내. 영문도 모른 채 무조건 "아빠는 1등"을 외치던 세살배기 아들 동수의 해맑은 웃음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순간 김영호는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감상에 젖어있을 순간이 아니다.1점을 따기 위해 다시 작전을 구상해야 한다.

검을 들고 상대를 견제하고, 상대가 들어오면 한 발 물러선다. 그래도 상대가 밀고 들어오면 그 때는 역습이다.

김영호의 머리에 작전이 세워졌다. 지금까지 이 작전으로 톡톡히 재미를 봤다. 딱 한번만 더 성공하면 금메달이다.

남은 시간은 2분5초. 절대 서두르지 말자. 김영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때 비스도르프가 순간적으로 전진했다. 한 발 물러섰다. 그래도 상대가 전진한다. 순간 김영호의 눈이 마스크속에서 빛났다. 상대가 작전에 말려들었다.

한 발 전진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상대를 내리 찍었다. 그리고 `찰나'가 지난 뒤 상대의 칼이 가슴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눈을 돌려 심판을 봤다. 심판이 자신의 득점을 인정하며 팔을 들어올렸다.

해냈다. 서러웠던 인생.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는 눕고 싶다. 누워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시드니=연합뉴스) 특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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