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수출 반 토막 … 한국무역 24개월 만에 적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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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현 지경부 실장

1일 수출입 동향 브리핑에 나선 지식경제부 한진현 무역투자실장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한 실장의 별칭은 ‘미스터 흑자’다. 그가 무역 주무 국장이 된 2010년 2월 무역수지는 전달 적자에서 흑자로 반전됐다. 이후 수출이 승승장구하며 흑자 행진은 지난해 12월까지 23개월간 이어졌다. 여기에 무역규모 1조 달러의 기록도 세웠다. 이 기간 우리 경제를 사실상 ‘원 톱’으로 이끌어 온 게 수출이라 자부심도 컸다. 새해 벽두부터 수출 전선에 이상조짐이 감지되며 비관적 전망이 흘러나왔지만 그는 “어렵긴 하지만 더 지켜보자”며 기대를 버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날 공개된 1월 무역수지는 19억6000만 달러 적자였다. 5억 달러 안팎의 적자를 점친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수출은 415억30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6.6% 줄었다. 반면 수입은 434억9000만 달러로 3.6% 늘었다. 이날 한 실장은 “예상보다 적자 폭이 큰 건 사실”이라면서도 “일시적인 계절 효과의 영향이 있었던 만큼 2월에는 흑자 반전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통상 1월 수출은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업체들이 연말에 집계하는 실적을 의식해 ‘밀어내기 수출’을 하는 경우가 많아 아무래도 다음 해 연초에는 수출 여력이 줄기 때문이다. 1월 무역수지는 2008년 이후 지난해 한 해를 제외하고 모조리 적자였다. 여기에 올해는 설 연휴가 겹치면서 조업 일수도 줄었다. 지난해 설은 2월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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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무역적자의 가장 큰 원인이 이 ‘1월 징크스’라는 데는 대부분 전문가가 동의한다. 하지만 수출이 증가세 둔화를 넘어 아예 줄어든 것은 아무래도 꺼림칙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월간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로 감소한 것은 2009년 10월 이후 27개월 만이다. 지난달 수출 성적표에서 드러난 불안의 근원은 지역으론 재정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유럽, 품목에서는 선박이다.

 유럽연합(EU)으로의 수출은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44.8% 줄며 반 토막이 났다. 일본(37.2%), 미국(23.3%), 중국(7.3%) 등 다른 주요 지역으로의 수출이 상대적으로 호조를 보인 것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유럽 위기가 본격화되면서 이 지역으로의 수출은 ▶10월 -20.3% ▶11월 -5.1% ▶12월 -19.7%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선박 수출도 전년 같은 달에 비해 41.5% 줄었다. 지난해 1월 선박 수출액이 월간 최대치(67억 달러)를 기록하는 등 유달리 컸던 영향도 있다. 이른바 기저효과다. 하지만 선박이 당분간 예전 같은 ‘수출 효자’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유럽 금융시장의 돈줄이 막히면서 선주들이 자금 조달을 못 해 제때 배를 찾아가지 못하거나 계약을 취소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12월 5893억원어치의 초대형 유조선 2척과 벌크선 2척의 계약을 취소당했다. STX조선해양도 지난해 23척에 대해 인도 연장 요구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올해부터 나갈 선박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이후 수주된 것이라 물량 자체가 적다. 통상 선박은 수주 후 배를 만들어 발주자에 넘기는 데 2년 반~3년가량이 걸린다. 수출 통계에 잡히는 건 배가 나가는 시점이다. 국내 조선업체의 선박 수주는 2007년 3200만CGT(표준화물선 환산 t)에서 2008년 1800만CGT, 2009년 450만CGT로 급감했다. 조상현 무역협회 연구위원(동향분석실)은 “선박 수출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이란 건 예견됐던 일이지만 유럽의 재정위기와 겹쳐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의 변수로 거론되는 건 유럽 위기의 향방과 함께 중국 경제의 연착륙 여부, 원자재 가격 등이다.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세계 경기는 고꾸라지는 데 이란 제재의 여파 등으로 국제유가 등은 오름세를 타는 것이다. 지난달에도 원유·가스 등의 국내 도입 물량은 줄었지만 단가가 상승하면서 수입이 늘어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영식 수석연구원은 “세계 경기가 지난해 말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식는 것 같다”면서 “미국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유럽의 소비심리 위축을 보완할 정도는 아니고, 자칫 중국에까지 그 영향이 파급될 경우 우리 수출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도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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