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일흔여섯의 제자 황상 … 우직한 글공부 까닭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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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삶을 바꾼 만남-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정민 지음, 문학동네
592쪽, 2만3800원

1802년 10월, 유배 온 죄인이 주막집에 열었던 작은 서당에 산석(山石)이라는 이름만큼 둔해 보이는 열다섯 소년이 찾아왔다. “저같이 둔하고(鈍) 앞뒤가 꼭 막히고(滯) 답답한(<621B>) 아이도 공부를 할 수 있나요?” 스승은 재빠르고(敏) 날카롭고(銳) 빠른(捷) 천재보다 미욱한 둔재의 노력이 훨씬 더 무섭다고 일깨워줬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과 그의 제자 황상(1788~1870)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의 재발견』 등을 내며 최근 몇 년 새 다산에 푹 빠져 지내는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그가 이번엔 다산이 가장 아끼던 제자였지만 그간 주목 받지 못했던 황상이라는 인물에 숨을 불어 넣고, 스승과 제자의 운명적인 만남을 복원했다.

 황상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잊지 않았던 스승의 가르침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던 ‘삼근계(三勤戒)’. 황상은 스승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뼈에 아로새겼다.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날 만큼 공부에 몰두한 스승, 일흔여섯의 제자는 건재한 복사뼈를 부끄러워하며 주변의 만류에도 연신 붓방아를 찧었다.

  “저같이 머리 나쁜 아이도 공부할 수 있나요”라던 소년은 3년 반 만에 스승의 형 정약전이 “월출산 아래 이런 문장이 나다니”라며 놀랄 만큼 성장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황상이 우직하게 걸어온 길은 출세가 아니었다. 다산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조용한 곳에서 공부하며 사는 ‘유인(幽人)’의 삶을 일렀다. 제자는 산속에 거처를 마련해 농사를 지으며 책을 놓지 않았다.

  교사와 학생은 있어도 스승과 제자는 잘 보이지 않는 요즘의 세태를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200여 년 전 시문과 편지를 재구성해 그려낸 제자와 스승의 만남은 한 편의 휴먼 드라마다.

최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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