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맣게 잊고 살아온 것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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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호 38면

당신은 꿈을 꾼다.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성탄전야에는 누구라도 꿈을 꾸는 법이다. 스크루지 영감처럼.
꿈속에서 당신은 연탄을 나르고 있다. 어린 시절 당신이 살았던 산동네. 가파른 계단과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엉켜 있는 그곳에서 당신은 양손에 든 집게로 연탄을 나른다. 공터에는 오늘 당신이 날라야 할 연탄이 63빌딩처럼 쌓여 있다. 꿈속에서도 당신은 의아하다. 이곳은 어린 시절 살았던 곳인데 왜 회사에도 안 가고 여기서 연탄을 나르고 있는지. 양손에 두 장씩 연탄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당신 옆으로 골목에서 튀어나온 한 무리의 아이들이 우르르 지나간다. 한 아이와 부딪힌다. 당신은 그만 한쪽 집게를 놓친다. 떨어진 연탄 두 장이 보기 좋게 박살 난다. 화가 난 당신은 달아나는 아이를 붙잡는다. 아이는 어린 시절의 당신이다. 지금의 당신이 어린 당신을 야단친다. 어린 당신이 운다. 지금의 당신은 화가 나고 어린 당신은 무섭고 슬프다.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당신은 잠을 깬다. 꿈이지만 너무 생생해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본다. 눈물이다. 당신은 부엌으로 가 물을 마신다.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당신 아버지는 퇴직 후에 쌀가게를 한 적이 있다. 연탄도 함께 팔았다. 장사 경험이 없는 아버지가 그런 가게를 한 데는 쌀과 연탄이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설마 망하기야 하겠느냐고, 망하더라도 쌀은 우리가 먹고 연탄은 우리가 때면 된다고, 당신 아버지는 말했다. 망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되는 것도 아니어서 결국 아버지는 몇 년 후 가게를 정리했다. 지금은 까맣게 잊고 살지만 그 가게를 하던 무렵에 당신은 대학을 다녔다. 당신 아버지가 져다 나른 쌀과 연탄으로 말이다. 어쩌다 방학 때 당신은 아버지의 일을 거드는 시늉을 몇 번인가 했지만 오히려 방해만 된다는 아버지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만두었다. 당신은 그런 자식이었다.

당신은 또 기억해 낸다. 10년 전쯤에 조금 특별한 송년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것은 회사 송년회 비용으로 연탄을 사서 필요한 이웃에게 전달하는 행사였다. 좋은 취지의 행사였지만 홍보 목적도 있어서 연말 따뜻한 기삿거리를 찾던 기자들도 불렀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자원한 임직원들이 새벽부터 모여 동사무소에서 지정한 가정으로 직접 연탄을 날랐다. 연탄 나르는 일은 힘들었다. 산동네라 모든 길이 가파르고 좁았다. 시간이 갈수록 연탄은 무거워졌다.

하지만 마음은 조금씩 가벼워졌다. 이웃의 궁핍을 이용하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당신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얼마 안 되는 연탄을 너무 고맙게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당신의 그런 마음도 다 허영 같았다. 그만큼 연탄이 절실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원래 동사무소에서 지정해준 가정이 아닌데 어떤 할머니 한 분이 부려 놓은 연탄을 보고 당신도 몇 장 가져가면 안 되느냐고 한다. 그러시라고 하자 할머니는 연탄집게 둘을 들고 연탄을 집으로 나른다. 허리 굽은 할머니의 몸놀림이 그렇게 재빠르고 민첩할 수 없다. 그걸 보면서 당신은 마음이 아팠다. 아팠던 것 같다. 그때는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까맣게 다 잊었지만 말이다. 당신은. 그러니까 나는.

성탄절이다. 누구에게도 춥지 않은 성탄이 되면 좋겠다.


김상득씨는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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