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정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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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이 어렸을 적 살았던 집은 그야말로 '앞뜰과 뒷동산'이 있는 큰 집이었다.

대문도 커서 동네에서는 그 집을 '큰 대문집'이라고 불렀다. 큰 대문집에는 넓은 앞뜰에 나무들 사이사이에 돌들이 놓인 정원이 있었다.

잘 가꿔진 정원이 있는 뜰에서 백남준은 동갑내기 외사촌 옥희라는 애와 소꼽놀이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며 놀았다. 나도 그때 자주 놀러갔기 때문에 그 정원 뜰에서 셋이 함께 놀곤 하였다.

얼마전, 어른이 된 옥희라는 여인을 만났더니 "남준이의 'TV 정원'을 보니까 어렸을 때 자기집에 있던 정원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백남준의 작품에는 어려서 경험했던 일들을 소재로 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TV 정원'은 원래 1974년에 제작된 것인데 1982년에 휘트니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선보이고 금년 2월에 구겐하임미술관의 〈백남준의 세계〉에서 가장 멋있는 '정원'으로 만들어 관객들의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뉴욕타임즈의 미술담당기자 그레이스 그루크는 구겐하임 'TV 정원'을 보고 가장 야심적인 현대판 작품이었다며, "무성한 푸른 나무들이 퍼져서 회랑(回廊)의 가장자리에 처져있는 분위기가 흥미롭게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구겐하임을 위해 그린 원래의 그림 특징과 같다"고 평했다.

미술평론가들은 'TV 정원'을 자연과 전자기계의 융합 또는 옥외와 옥내의 결합이란 해석으로 이 작품에 경의를 보낸다.

살아있는 나무와 흙, 이같은 자연에다 쓰지 못하게 되면 내다버리는데도 두통꺼리인 그 딱딱하고 투박한 괴물상자를 어우러트려서 옥외이건 건물안에서건 황홀한 정원을 꾸밀 수 있다는 백남준의 기상천외한 생각을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원에서 아무렇게나 뉘어져서 영상을 내보내고 있는 많은 TV 모니터들이 나무들속에 놓여진 잘 생긴 정원석으로만 느껴지는 것은 어렸을 적의 백남준집에서 보던 정원을 생각해서일까. 그 정원석에서 꽃이 피고, 나비와 벌들이 날고, 그리고 요정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느낌이 든다.

TV 모니터에서 영상으로 나오고 있는 '글로벌 그루브'(Global Groove)속에는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재미나는 일들이 다 합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상상을 할 수있는지 모른다.

백남준의 'TV 정원'을 보고 있으면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좋아하는 어린애가 된다.

전시는 10월 29일까지 호암·로댕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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