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왜 사형선고 받고 기뻐했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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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호 19면

두 동강 난 액자 프레임을 뚫고 나온 무대는 인간의 내면을 쏟아 보이는 고백의 장이다. 서로에게 의지해 살아가면서도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상대를 용서하면서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의 심리, 그 불편한 진실의 고백.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창설하고 국제극예술협회장을 7년간 역임하며 연극계를 이끌어온 ‘한국 연극의 대부’ 김정옥(79). 그의 연극 50주년, 100번째 작품 연출을 기념한 연극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이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은 1969년 초연 이래 숱한 화제를 낳으며 78년까지 수차례 공연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원작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알베르 카뮈가 희곡으로 각색한 ‘한 수녀를 위한 진혼곡’. 두 노벨문학상 작가의 손끝을 거친 명작을 한국 연극의 거장은 어떻게 표현했고, 30여 년 만의 재공연은 어떤 변모를 보여줄 것인가? 이 공연이 주목 받는 이유다.

연극 ‘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 12월 23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이 극은 인간의 고통과 욕망에 대한 본질적 문제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그리스 비극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주인의 아기를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자 “오 주여, 감사합니다. 주님이시여!”를 외치는 흑인 유모 낸시. 그녀는 왜 주인의 아기를 죽이고도 당당할까. 왜 자신의 죄를 변명하지 않고 사형선고에 기뻐할까. 아이를 잃은 여주인 템플은 범인의 사형선고에 오히려 불안해한다. 이들의 모순된 행동의 이면에는 두 사람의 아픈 과거와 진실이 숨겨져 있다.

30여 년 전의 무대가 낸시와 템플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면 2011년 공연은 템플과 고완 부부의 관계에 주목했다. 미국 남부 문학인 원작의 인종차별적 사회상이 어느 정도 극복된 시점에서 보다 보편적이고도 개인적인 내면의 문제에 확대경을 대는 의미다. 부조리한 사건의 수수께끼를 시간의 드라마로 파헤치는 추리소설의 기법은 의문을 증폭시키고, 열쇠를 쥔 인물의 자기고백은 모순에 찬 인간심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가정을 이루고 살지만 끊임없이 불행한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 위선의 굴레를 벗어나 차라리 완벽한 악으로 도피하고픈 잠재된 심리는 외적인 요인에 의해 언제라도 분출될 수 있다는 것이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품고 사는 ‘불편한 진실’이다.

진실을 감추려는 여자와 진실을 알고도 외면하는 남자, 진실을 밝혀야 하는 외적인 요구의 삼각 구도가 이루는 팽팽한 긴장관계는 서로를 용서하면서도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부부의 오랜 고뇌를 어쩔 수 없이 드러낸다. “악 가운데 휴식을, 죄에 대한 결정적 확신을 바랐다”는 템플과 “용서는 하기 쉬워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는 고완의 대사가 이들을 구속해 온 심리 상태, 그 불편한 진실을 대변한다. 그러나 결국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결말 또한 평화를 위해 그들이 받아들여야 할 진실이다.

30대 초반으로 설정된 배역보다 실제 나이가 20~30년 뛰어넘는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공간은 리얼리티를 초월한 또 다른 차원의 무대 언어로 다가온다. 용서와 책임, 복수와 연민, 일탈과 구원 등 형언할 수 없는 모순된 감정의 복합된 표현은 관록의 배우들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연기다. 작품의 핵심 인물로 관객의 몰입을 책임지는 템플 역의 김성녀는 “젊고 경험이 적은 배우는 안 된다. 이 역할을 소화할 배우는 김성녀뿐”이라는 김정옥 연출의 단호한 판단으로 낙점됐다고.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진실이 탄로날까 노심초사하면서도 죄의식에 몸부림 치는 섬세한 연기를 차가우면서도 열정적인 그녀만의 개성으로 풀어냈다. 오랜만에 만나는 정통 연극이 낯설거나 진부하지 않은 것은 인간의 근원적 문제의식에 대한 성찰과 그 숙성된 표현이 우리에게 보편적 울림을 주는 자아의 고백으로 다가오기 때문 아닐까.

윌리엄 포크너(William Cuthbert Falkner)
미국 작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사람.1949년 노벨상을 받았다. 고향 미시시피를 무대로 인간에 대한 신뢰와 휴머니즘의 역설적 표현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규명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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