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갈참나무 숲으로 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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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갈참나무 Quercus aliena

갈참나무 숲으로 가자  -  김은숙(1961~ )

나의 사랑은 늘 불온하였다

견뎌내거나 견뎌내지 못한 시간이

시월의 저녁 아래 낮게 엎드리고

갈참나무 매달린 저 작은 열매가

이 계절의 정수리에 아프도록 빛난다

굳어버린 생채기만 단단한 옹이로 키우며

어설픈 열매조차 맺지 못한 내 불온한 사랑은

저녁 갈참나무 숲에 와서 무릎을 꿇는다

그대여 나여 지나간 사랑이여

갈참나무 저 작은 도토리처럼

떫은 몸 스스로를 몇 번이고 씻어내며 지워

거친 밥상 따뜻하게 채우는 양식이 되거나

해거름 쓸쓸한 가지로 날아드는 새에게

푸근한 둥지 자리조차 내어주지 못한

척박한 묵정밭의 생애여

(… …)

후줄근히 구겨진 내 사랑의 허물은

갈참나무 숲에 쌓인다

누군가가 그리워지면 숲으로 가야 한다. 바람 따라 사랑을 짓고 생명을 잉태하는 숲에 들어서서 숨 한번 크게 쉴 일이다. 갈참나무 잎 겨드랑이에 맺힌 도토리는 사랑의 절규이고, 생명의 아우성이다. 비바람 몰아치고 햇살 따가워도 어김없이 잉태한 생명의 씨앗이다. 누구에게 따뜻한 양식도 내어주지 못하고, 겨울 바람에 차가워진 누군가를 안아주지도 못하는 사람살이의 그림자는 숲 그늘에 내려놓으면 된다. 누군가가 그리우면 철 따라 잎 돋고 꽃 피고 열매 맺는 생명의 숲으로 가야 한다. 알알이 여문 도토리 앞에 고백성사 하듯 무릎을 꿇고 지나온 삶을 가만가만 짚어볼 일이다.

<고규홍·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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