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타고, 비천검법(卑賤劍法)이 춤을 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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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랑(신현준)은 지붕을 넘나드는 화려한 경공술을 선보이며 철기십조를 이끌고 그의 원수인 남궁연길의 저택에 잠입한다. 무사들뿐만 아니라, 남궁연길의 저택에 살고 있는 무고한 사람들조차 거대한 살육의 대상이 된다. 남궁연길은 자결하고, 설리(김희선)는 죽었다고 여겼던 자하랑/진하와의 만남에 당혹해한다. 살육이 끝난 뒤 자하랑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던 여진은 이제 복수가 끝났으니 당신이 싸워야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고 말한다.

영화 〈비천무飛天舞〉를 보면서 내내 여진의 질문에 신경이 쓰였다. 여진의 질문 자체가 마치 이 영화에 질문하는 것처럼 느껴졌었기 때문이다. 크레인 줄에 매달려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와이어 액션은 분명 대단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들이 날아다니는 근거는 분명 무공의 뛰어남에 있을 것이고, 그 무공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중국의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와 홍콩의 무술팀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날아다녀야만 하는 이유는 무공도, 홍콩의 무술팀도 제공하지 못한다. 자하랑은 왜 자신의 현란한 비천검법(飛天劍法)을 무고한 사람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리는, 지극히 '비천(卑賤)'한 일에 소진했던 것일까? 여진이 자하랑/진하에게 한 말은 그래서 영화〈비천무〉의 혈투가 어떤 근거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가를 묻는 뼈아픈 질문처럼 보였다.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이러한 질문에 나름대로의 답변을 마련했어야만 했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질문에 답하거나, 이유를 찾는데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영화 〈비천무〉가 김혜린의 원작 만화와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진하가 준광과의 결투 끝에 화살세례를 받고 벼랑으로 떨어진 장면에서 영화는 평범해 보이지만 극히 중요한 생략을 한다. 원작 만화에서 진하는 벼랑에서 떨어진 뒤 망월도라는 섬에 끌려가고, 거기에서 설리가 준광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절규한다(마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연상케 한다). 망월도에서의 칼부림 섞인 탈출을 통해 비천검법은 활검(活劍)에서 살검(殺劍)으로, 조혼(祖魂)이 담긴 정무(正武)에서 사(邪)의 피로 더렵혀지고, 진하는 자하랑이라는 청부 자객으로 변모한다.

마치 〈쉬리〉의 이방희/이명현이 액션과 멜로의 경계선이었듯이 자하랑/진하의 이중 쌍은 거칠게 말하자면 무협과 멜로를 경계짓는 사선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김희선의 연기가 문제가 된다고들 하지만, 정작 이 영화에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자하랑이라는 인물이다. 싸울 이유를 찾지 못하는 비운의 검객이 청부 자객으로서 매번 싸움을 감행해야만 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할까? 아마도 그것은 업보와도 같은 운명이라 불릴만한 질곡을 갖고 있다. 추억의 상념에 사로잡힌 무사는 〈소호강호〉나 〈동방불패〉에서 보여지는 호방한 검객이 아니라, 청부 살인자들인 〈동사서독〉의 무사에 가깝다(물론 무사의 성격이 그렇다는 말일뿐이다). 아마도 자하랑은 공간 감각뿐만 아니라, 시간 감각을 상실한 사멸해가고 있는 영웅 무사로 그려질 뻔한 인물이었다.

사실 영화 내내 무수한 살육을 목격하면서도 두 남녀의 사랑을 용인할 여유를 우리가 갖기 위해선, 이런 이중성을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무언가 특별함이 있어야만 한다. 그 특별함이 운명적인 사랑이라면, 그 만큼 살육 또한 운명적인 순간들을 경험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래서 〈비천무〉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운명의 순간들에 대한 사색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이 영화의 허물을 지적하는 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정당한 비판이 때론 지나친 요구나 주문처럼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를 달리 보자면, 이 영화가 만화를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기에 이야기 구성이나 인물 구성의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지적하는 것은 적절한 비판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는 어쩔 수 없는 생략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앞서 지적했듯이 그 생략이 적절한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화와 영화를 대비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영화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자본력만 충분하다면 만화보다 영화의 액션 장면이 더 관객의 눈길을 끌기 쉽다. 액션의 본성은 어쨌든 움직임에 있기 때문이다. 대신 만화는 한 컷 한 컷 사이에 수많은 사색의 여백을 만들어낼 수 있다.

김혜린의 만화는 분명 영화 〈비천무〉보다 훨씬 심오한 사색으로 가득차 있고, 그 대부분은 그림뿐만 아니라, 기실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영화 〈비천무〉는 분명 영화화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손쉬운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은 불가피했나? 혹은 그 선택이 정말 더 영화적인 것이었을까? 그래서 아마 이 영화에 대한 가장 따끔한 비판(그리고 가장 듣기 싫은 비판)은 영화 〈비천무〉가 만화 〈비천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질책하는게 아니라, 정말 영화적인 것이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는지를 질책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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