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젖는 당신의 가방…추락하는 마음

중앙일보

입력

비가 온다. 하늘을 적신 비가 하중을 이기지 못해 지상으로 추락한다. 나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음을 향해 돌진한다. 유진 스미스의 〈역 플랫홈에서〉라는 사진.

스미스는 '보도사진의 성자이며 순교자적 인물'이라는 칭호답게 다큐멘터리적 시각으로 세계를 통찰하고 해부하는 능력의 소유자다. 사회의 병리를 날카로운 칼로 도려내는 진지한 태도에서 장인정신을 읽는다. 그러나 나는 묘하게도 그의 르뽀르따주적 예리함보다 시적 분위기에 더욱 매료된다.

이 사진은 그 중 하나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두 가지 묘한 상상에 빠진다. 그 하나.

기차는 연착이다. 집을 나설 무렵, 하늘은 흐려 있었다. 물 먹은 하늘이 미묘한 불안을 야기했지만 그러나 기차만 탈 수 있다면, 더구나 아예 이곳을 탈피할 수 있다면, 비가 와도 무슨 상관이랴 생각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기차는 연착이다. 설상가상 오전부터 끈적하고 불쾌한 습기를 동반한 불청객 바람은, 이윽고 비를 동반했다. 플랫홈이 순식간에 비에 젖기 시작했다. 지루하게 기차를 기다리던 승객은 그만 짜증이 났다. 출발하기도 전에 불행을 만난 것이다.

작가 유진 스미스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한 것 아닐까. 혹은 역으로 다음의 추측도 가능하리라.

승객은 어제 밤기차를 탔다. 지난 밤 거칠게 차창을 부수는 바람이 긴장을 강화하며 숙면을 방해했다. 어둠과 바람은 밤새 동행했다. 그러나 어김없이 새벽은, 어둠의 끝자락을 붙잡고 힘겹게 방문했다. 부끄러운듯 어느새 곁에 와서 인기척했다.

그리고 비로소 아침이다. 아침은 농담이 진한 먹물의 흘림처럼 잔뜩 흐렸다. 차창으로 얼굴을 내민 풍경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바람을 가르며 묵묵히 목적지를 향해 쾌속항진하던 기차는 그러나 목적지에 가까울 무렵 멈칫 멈칫 몸을 사렸다.

엔진에 이상이 왔다. 시간은 조금씩 여위어 가고 기차는 연착이다. 설상가상,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 망치처럼 차창을 쩌억 쩌억 내리치기 시작했다. 기차는 말처럼 헉헉 투레질하며 힘겹게 힘겹게 종착역을 향했다.

이윽고 시간의 흐름마저 무감각해질 무렵 기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힘에 부친 기차는 곧바로 쓰러졌고 피곤한 승객들은 역사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폭우 때문이다. 그러나 승객은 플랫홈까지 퍼붓는 비를 어쩌지 못하고 잠깐 생각에 잠긴다. 어디로 간다. 그는 중얼거린다. 이곳은 처음인데.

유진 스미스의〈역 플랫홈에서〉는 이런 상상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사진은 눈물샘을 자극하여 묘한 슬픔을 자아낸다. 그것은 당연하리라. 사진 속 주인공은 절해고도에 고립무원으로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인데 우리는 그 주인공과 자신을 쉽게 동일화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 싸르트르식의 자유를 향한 실존은 그러나 늘 진취적이기보다 이렇게 외롭고 피로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한다.

돌처럼 무거운 가방은 감내하기 어려운 험한 일상을, 그리고 퍼붓는 비의 위세는 그가 대면한 냉혹한 세계를 비유한다. 비는 그를 문처럼 차단하지 않는가. 그리고 두 개의 가방. 그가 그동안 성취한 것은 고작 이것 뿐이다.

굳게 닫힌 입술처럼 단단하게 채워져 터질 듯한 가방의 부피감이 곤핍한 삶의 무게를 전달한다. 무게는 주인공의 삶을 짓이기는 것 같다. 더구나 가방은 플랫홈의 돌바닥과 굳게 밀착돼 있지 않은가.

유진 스미스 역시 그를 위에서 조감하며 끊임없이 추락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강하게 부각시킨다. 모든 것은 지면과 입맞춘다. 어쩌면 나는 새 마저도 추락할 듯이.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닿고 싶은 곳〉(최문자)

또한 냉혹한 돌바닥은, 죽지 못해 서서 '정신의 땀을' 흘리는 남자의 가슴을 향해 빗줄기를 탄환처럼 되돌린다. 갈기갈기 찢기는 가슴. 그는 얼음처럼 굳었다. 갈 곳이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랜 시간 플랫홈에서 왕래하는 기차를 응시할 뿐이다. 이미 바닥과 코트를 적신 비는, 세상과 대면하지 못하는 그의 무력한 심리는 물론, 그가 플랫홈에서 소비한 시간의 양을 반영한다.

"수직으로 서서 죽는"(허만하,〈프라하 일기〉)빗줄기는 추락하는 목숨처럼 허망하다. 더구나 야속한 바람이 슬쩍 외투를 헤집고 그를 농락하고 있지 않은가. 바람은 가뜩이나 구겨지고 주름진 외투를 더욱 초췌하게 보이는데 공헌한다. 그것은 마치 순결한 속살을 유린하는 강팍한 힘 같다.

세상과 대면한, 아니 세상의 힘에 유린당하는 한 인간의 왜소함은 이렇게 공허하다. 지면으로 무너지는 육체, 땅으로 무너지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삶이며, 삶 자체가 힘든 일상마저 극복해야 한다는 명제라는 사실을 간파한다면 새처럼 나는 꿈은 꾸지 않아도 좋을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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