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에도 등급 있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40호 31면

“거리에서 외국인을 보면 웃어 주세요.”
1988년 서울올림픽 직전 텔레비전에서 봤던 공익광고 문구다. 올림픽을 앞두고 쏟아진 공익광고의 홍수 속에서도 굳이 이 문구가 생생하다. “왜 외국인이라고 무조건 웃어줘야 하는 건가요?”라고 눈치 없이 담임선생님에게 물었다가 꿀밤을 맞았기 때문이다. “나쁜 외국인도 있을 수 있지 않느냐”는, 단순하지만 나름의 논리가 있었던건데 담임선생님에겐 ‘애국심 부족한 예의 없는 학생’쯤으로 비췄던 듯싶다. 당시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럴 법도 했다.

On Sunday

생각하면 이 공익광고 덕도 봤다. 영어신문에서 근무하던 2003년 여름, 서울 시청 근처를 외국인 에디터와 함께 걷고 있을 때였다. 바로 뒤에서 걸어오던 아저씨 한 명이 나에게 “외국인 애인이랑 시시덕거리니까 좋으냐”라고 비아냥거렸다. 얼굴이 확 굳어졌다. 눈치 빠르고 까칠하기로 이름 났던 그 에디터, 바로 상황 파악을 하고 뒤로 돌아 그 아저씨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자 우리의 아저씨, 공익광고에 나오던 예의 그 ‘웰컴 투 코리아’ 미소를 날리고는 황급히 우리 앞을 지나쳐 버렸다. 입맛이 씁쓸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만약 그 에디터가 영어를 하는 파란 눈의 백인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같은 시기 한국에서 근무했던 흑인 에디터 한 명은 은근히 인종차별을 당하는 것 같다고 불만이 많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외국인의 등급을 분류해 놓고 있는 건 아닐까. 1등급은 영어를 하는 백인, 2등급은 영어를 못 하는 백인, 3등급은 영어는 하지만 백인이 아닌 외국인, 4등급은 영어도 못 하고 백인도 아닌 외국인, 이런 식으로 말이다. 1등급 외국인 앞에 서면 ‘오렌지’를 ‘아륀지’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닌지 진땀을 빼지만 기타 등급들에게는 왠지 모르게 무시하는 마음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강해진 건 지난 주말, 일본인 관광객으로 가득한 남대문을 지나면서였다. 한 젊은 남성 화장품 판매원이 지나가는 일본 여성들을 향해 “누나, 그날 밤 기억 안 나? 여기 와 봐”라는 야릇한 얘기를 판촉이랍시고 하고 있었다. 삼삼오오 지나가던 일본 관광객들은 기분 나쁜 듯 얼굴을 찌푸렸다. 몰려오는 관광객이 묵을 숙소도 부족하고 즐길거리 개발도 필요하다지만 이런 식의 판촉이 나오는 태도라면 아무리 관광 인프라가 훌륭한들 무슨 소용일까.

관광객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건 한국 내 체류하는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이민자들이다. 다문화 한국의 토대를 이루는 이들에겐 등급도 없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대부’ 김해성 목사는 최근 본지 ‘10년 후 세상’ 시리즈 ‘다문화 한국’ 취재 과정에서 “외국인에 대한 차별은 결국 10년 후 한국 사회에 화약고로 돌아올 것”이라 경고했다. 외국인에 대한 마음속의 차별을 거두고 당당하고 평등하게 다가가는 게 우리에게도 이득이 될 거라는 얘기다. 외국인들에게 웃어줘야 할 것 같아서 웃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웃는 게 우리 정신 건강에도 좋을 것이다. 한국, 이젠 그럴 만한 당당한 나라도 됐다. 그러고 보니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은 서울올림픽 이후 딱 30년 만에 열린다. 그때 공익광고는 어떤 내용일까. 좀 더 성숙한 것이길 기대해 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