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판이 예술이 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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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제니 홀저의 올해 신작 ‘New Corner’.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신관 구석에 설치된 작품이다.


“내가 욕망하는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주세요(Protect Me From What I Want )”

 1985년 소비 문화의 본산, 뉴욕 타임스 스퀘어 전광판엔 마치 성경구절 같은 이 경구가 흘러갔다. 미국의 개념미술가 제니 홀저(Jenny Holzer·61)의 작품이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소비중독에 빠진 오늘의 상황을 보여주는 동시에, 번화가의 전광판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전광판은 뉴스와 광고의 전유물이었다. 제니 홀저는 이걸 미술 작품의 캔버스처럼 사용했다. 영상을 배제하고, 짧은 문장들로 이뤄진 강렬한 메시지를 보냈다.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휘트니 미술관, 독일 국회의사당, 뉴욕과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등 그의 전광판 작업은 세계 곳곳에서 번쩍였다. 90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대표작가로 전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제니 홀저

 ‘전광판 작가’ 제니 홀저의 개인전이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2004년에 이은 국내 두 번째 개인전이다. 문장을 건물에 투사시킨 뒤 이를 찍은 흑백 사진, 발광 다이오드(LED) 전광판 작업, 대리석 의자에 “다른 누군가의 육체는 당신의 정신을 위한 안식처(Someone Else’s Body is a Place for Your Mind to Go)” 같은 의미심장한 문구를 새긴 조각 등 23점을 선보인다. 전시를 위해 방한한 작가는 “사람들이 설교하듯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나는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때문에 인과관계가 결여된 다양한 문장들을 흘러가도록 보여준다”고 말했다. “무명의 거리 예술가로 출발한 나는 전시장 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사람들이 예술을 접하길 원했다. 그걸 여섯 살 때 매료된 타임스 스퀘어의 빛나는 전광판에서 발견했다”고도 덧붙였다. 10월 16일까지, 무료. 02-733-8449.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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